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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신문

‘대숲’에서 ‘에타’까지 … 대학 익명 커뮤니티의 세계

대자보 등 아날로그 매체의 쇠퇴 속 떠오른 디지털 매체


대학생 A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에 오른다. 아침 식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없고 지갑 사정도 넉넉지 않다. 오전 수업을 마친 그는 홀로 학식에서 아침 겸 점심(아점)을 먹는다. 여전히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A씨는 식사를 하며 페이스북 ‘대나무숲’ 페이지를 본다. ‘졸업이 다가오니 취업이 걱정스럽다’는 글부터 ‘군기를 잡는 선배를 고발한다’는 글까지 다양하다. 힘을 얻기도,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식사를 마친 그는 강의실에서 만난 동기들과 대나무숲에서 화제가 되었던 글에 관한 의견을 나눈다. 2010년대 이후 대학가에 새롭게 나타난 모습이다.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익명 커뮤니티의 등장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웹상에 다양한 익명 커뮤니티들이 생겨났지만,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쉽게 떠올리는 익명 커뮤니티는 ‘대나무숲’이다. 대나무숲이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의 신라 경문왕 설화에서 유래했다. 내용은 이렇다.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뒤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복두장(왕이 쓰던 관을 만들던 사람)뿐이었다. 복두장은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와 같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이를 숨겼고, 도림사라는 절 근처의 대나무숲에 찾아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나무숲은 남들에게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다.

2013년 ‘서울대 대나무숲’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진 대나무숲은 2017년 현재 전국 1백20여개 대학에 존재한다. 이 중 몇몇 대나무숲은 팔로워 수가 수십만 명에 육박하여 웬만한 전국 커뮤니티에 맞먹는 파급력을 가지고 있어서 대나무숲에서 논의된 주제는 때때로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는 대나무숲이 가진 ‘익명성’ 덕분이다. 학생으로부터 받은 제보를 게시하는 형태인 대나무숲은 학과 내 군기사건이나 교수의 부적절한 발언들에 대한 제보가 쏟아져 일종의 ‘신문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중 몇몇은 큰 사건으로 번지기도 하는데, 특히 지난해 이화여대 대나무숲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설립에 반대 의견을 모아 결국엔 설립 철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우리학교의 경우 지난해 12월 익명의 학생이 공과대학 경비실에 접이식 침대를 선물한 선행이 계명대 대나무숲을 통해 알려지면서 학내외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 “비사광장보다는 대나무숲이죠”

익명 커뮤니티는 대나무숲이 전부가 아니다. 현재 우리학교 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익명 커뮤니티는 페이스북 페이지인 ‘계명대학교 대나무숲’, ‘계명대 대신 전해드립니다’, ‘계명대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등 세 곳이고, 게시판 형식의 사이트는 ‘에브리타임’, ‘KMUMU’, ‘계명대 갤러리’ 세 곳이다. 이 중 페이스북 익명 커뮤니티 세 곳의 팔로워 수만 해도 모두 4만4천 명에 달한다. 이들 커뮤니티에서는 간단한 가십거리부터 생활정보, 부동산 거래, 동아리 홍보, 분실물 및 습득물 신고, 학과 내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 학생회에 대한 성토, 학교 측의 고압적인 행정 처리 등 폭넓은 주제가 활발하게 게시된다. 시간표 어플인 ‘에브리타임’의 게시판 목록(9월 6일 기준)을 살펴보면 ‘자유게시판’, ‘홍보게시판’은 물론 ‘비밀게시판’, ‘취업·진로’, ‘장터·원룸’, ‘이상형 적기’ 등 몹시 다양한 주제의 게시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커뮤니티의 활성화 정도는 우리학교 공식 커뮤니티인 ‘비사광장’을 훨씬 웃돈다.

비사광장은 20여 년 전 우리학교 홈페이지가 생겨난 이후 줄곧 학생들의 소통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학생들만을 위한 거의 유일한 온라인 커뮤니티이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비사광장은 운영되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다. 게시되는 글의 대부분은 스터디 모집, 동아리 신입부원 모집 등 홍보성 게시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끔 간단한 질문이나 건의사항이 올라오고 있지만 익명 커뮤니티와 같이 학생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비사광장이 학생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은 접근성 문제와 실명제로 인한 부담이 작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비사광장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학교 홈페이지를 경유해야 하는데, 굳이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글을 쓴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학생 또한 적지 않다. 교통공학과 소속 A씨는 “커뮤니티라면 솔직한 이야기를 부담 없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의 비사광장은 실명제로 운영되고 있어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며 “훨씬 이용자 수가 많고 파급력이 큰 대나무숲을 주로 이용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6일 아르바이트 전문 앱 ‘알바콜’이 대학생 회원 3백5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은 대나무숲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약 74%의 대학생들이 대나무숲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대자보를 대체한 새로운 대학문화로

과거 대학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역할을 한 것은 ‘대자보’였다. 학생들은 커다란 종이에 자신의 주장을 실어 학교 곳곳에 부착했다. 대자보 옆에는 그의 의견에 찬동하는 대자보가 붙기도 했고 반대하는 의견이 게시되기도 했다. 당시 대자보는 아날로그 시대의 커뮤니티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대자보와 같은 아날로그 매체는 힘을 잃고 점차 대나무숲과 같은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가 속속 들어서는 모양새다. 과거의 대학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하는 것이 ‘대자보’였다면 현재는 ‘대나무숲’을 비롯한 익명 커뮤니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익명 커뮤니티는 ‘익명성’이라는 강력한 장점 덕에 21세기 대학문화의 한 중심이 되었다. 익명성은 물론 유연한 운영 방식 덕분에 대학언론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내기도 했다. 대학생의 74%가 대나무숲을 긍정 평가한 데에는 익명 커뮤니티가 대학생들만의 ‘광장’이자 ‘신문고’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차별이나 혐오를 조장하는 일부 몰상식한 이용자의 행태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익명 커뮤니티가 가진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허위사실 유포 혹은 증오 발언에 대한 운영자들의 적극적인 관리와 더불어 이용자들의 건전한 의식이 동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