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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감각의 오솔길에서 만나는 황홀한 순간


올해 단풍은 유난히 고왔다. 특히 영암관 서편 언덕배기에 서 있는 당단풍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품이 넉넉한 그 나무가 시월 중순부터 발갛게 물들어가는 모습에 바쁜 발걸음을 붙잡힌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교정에서 이런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보름달이 뜬 초저녁 무렵, 궁륭의 하늘을 뒤덮은 맑은 청색의 신비로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시각적 경험보다 더 진하게 다가오는 것이 후각적 체험이다.

늦은 밤 아파트에 차를 세우고 내릴 때 훅 끼쳐오는 냄새. 쥐똥나무, 벚나무, 감나무 등의 나무 냄새와 맥문동, 인동초, 잔디 따위의 마른 풀냄새. 차가운 공기의 입자에 묻어와 가슴을 서늘하게 훑어 내리는 냄새. 그것은 내 비강을 자극하여 잊고 있던 계절의 감각과 더불어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우주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저녁 밥상의 청국장에 시장기 묻은 숟갈을 넣을 때 코에 당도하는 냄새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불러와 마주하게 만든다. 이럴 때 감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억이다. 감각이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만나고 그리운 사람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사람들의 감각은 점점 무디어지고 있다. 인터넷과 티브이, 영화, 광고 등 넘쳐나는 영상 이미지 탓이다. 이런 영상매체들은 모든 감각을 눈과 귀에만 맞춰놓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한다. ‘듣고’, ‘보는’ 감각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맡고’, ‘맛보고’, ‘만지는’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청각은 후미촉 감각보다 수동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자신의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를 통해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해 주체적인 감각보다는 주어진 지식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학습의 결과로 형성된다. 학습을 통해 취득한 지식은 그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 변조된 것, 가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은 상투화가 본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서는 지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적인 감각으로 세계를 만나야 한다.

다이앤 에커먼이 쓴 『감각의 박물학』(작가정신, 2004)은 우리에게 감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는 풍부한 독서체험을 바탕으로 예술과 철학, 문화인류학, 생물학을 가로지르며 감각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짚어낸다. 예컨대 인간의 두뇌는 원래 후각 줄기에서 발생한 것이며, 우리는 냄새를 맡기 때문에 생각도 한다는 통찰은 잊고 있던 후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촉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거칠고 굶주린 키스가 있는가 하면, 장난 같은 키스가 있고, 앵무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키스도 있다. 복잡한 사랑의 언어 가운데, 입술이 닿았을 때 입술로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키스로 봉한 말없는 계약서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저자는 유려하고 섬세한 필치로 경이롭고 황홀한 감각의 미로를 따라가면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감각 세계의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우리에게 감각은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오솔길이며, 그 길을 통해 광휘에 찬 이 세계의 경이를 만날 수 있다. 오솔길은 오고가지 않으면 금세 끊어지는 법이다. 여러분은 이 오솔길을 그냥 내버려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