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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공중파 명절 특집

지상파가 만들어야 할 명절특집은 지방, 서민, 타인종의 진실한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민족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다가온다. TV 프로그램 보기가 그나마 낙인 사람들은 명절이 조금 두렵다. 명절연휴만 되면 TV는 특집의 경연장이 된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특집 일색이다. 그 특집이 재미있고 기다려지는 것이라면 문제는 없다. 그렇지 않다는 게 두려움의 원인이다. 명절연휴가 되면 TV가 재미없어진다. 긴긴 연휴 명절특집은 따분하기 이를 데 없다.

명절 때만 되면 의례히 나오는 기사가 있다. 예컨대 지난 설 연휴 때는 이런 기사가 나왔었다. ‘설 특집 가장한 그대 이름은 짜깁기?’ 특집을 가장한 우려먹기, 재탕삼탕 방송을 비판하는 기사다. 당시 시청자들은 온갖 명목의 <무한도전> 베스트 및 재구성, 그리고 스페셜 방송을 설연휴 내내 봐야 했다. 심지어 하루에 오전 오후 두 번 방송되기도 했다. <황금어장>도 각 코너별 베스트편을 별도로 내보냈다. 다른 예능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추석 때도 당시 최고의 예능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은 연일 안방을 찾았다. 그때도 ‘시청자 우롱한 무늬만 추석특집 범람’이란 기사가 나왔다. <미녀들의 수다>는 우려먹기는 아니었으나, ‘미남들의 수다’라는 특집을 급조해 뒷말을 들었다. 10대를 대상으로 하는 쇼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들이 어색하게 트로트를 부르기도 했다.

기존 예능프로그램들의 짜깁기 재방송, 혹은 급조된 스페셜 방송 사이사이에 시청자들은 또 명절용 쇼를 봐야 한다. 이 명절용 쇼의 구성도 해마다 비슷하다. 제반 연예인들과 아나운서 등이 나와 장기자랑이나 게임을 돌아가면서 한다. 아니면 마술쇼, 아니면 외국인 노래자랑, 아니면 트로트 가수쇼다. 일부 연예인들의 겹치기 출연도 항상 문제가 된다. 권태롭고 피로하다.

해마다 이에 대해 냉소적인 비판기사들이 나오는데 언제나 그대로다. 이번 추석도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되진 않는다. 다만 올해엔 올림픽이라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시청자들은 올 추석에 올림픽 스타들을 모든 채널에서 ‘보고 또 보고’ 물릴 때까지 보게 될지도 모른다.

권태를 느낀 일부 시청자들은 케이블 TV로 눈길을 돌리기도 한다. 케이블 TV는 매니아들을 대상으로 연휴 집중편성을 해 지상파 방송으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아니면 소수가 볼 수 있는 전문적이거나 자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조금씩 영토를 넓혀나간다. 소수라도 각각의 프로그램들을 모두 합치면 무시 못할 크기가 된다. 지상파 방송의 명절 ‘국민특집오락’식 포맷은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시청자도 과히 바라지 않는 구태의연한 특집의 과잉은 지상파 방송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린다. 방송사는 특집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왕 특집을 만들려면 정말로 특집답게 신선하고 의미 있게 만들던지,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기왕에 하던대로 정규편성을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단지 재미가 없고, 시청자들이 떨어져 나간다는 이유로 특집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다양한 취향의 시대에 지상파 TV가 모든 국민의 기호를 다 충족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명절특집은 대체로 장년층 이상에 맞춘 국민오락문화 컨셉으로 제작되는 데 이것은 절대로 전체 국민의 기호를 만족시킬 수 없다.

재미가 떨어지는 건 그렇다고 치는데, 문제는 ‘무의미’하다는 데 있다. 모든 연예인이 한복 입고 나와서 뻔한 쇼를 벌이거나, 재탕삼탕 우려먹기 스페셜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 이전에 의미가 없다. 전파낭비로 여겨질 정도다.

지상파 방송은 한국에서 상업성 이상의 공공적 책무성을 요구 받는다. 명절 특집이 재미라는 상업적 가치도 충족시키지 못할 뿐더러 심지어는 공공적 의미까지 없다면 정말 허무한 일이다. 어차피 특집공세로 재미를 완전히 줄 수 없다면 오락성 특집은 제한적으로 치밀한 기획 하에서만 하고, 명절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특집을 좀 더 제공해주는 게 좋겠다.

명절은 민족의 잔치다. 즉 국민통합의 장이다. 우리나라는 요즘 점점 분열되고 있다. 계층양극화, 서울지방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고 인종문제까지 생겨나고 있다. 국제결혼은 너무나 흔한 일이 됐다. 명절날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나와 모두 행복하다는 듯이 노래나 부르는 것은 공허하다. 한국사회에서 점점 배제되고 있는 지방, 서민, 타인종의 진실한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정말로 지상파가 만들어야 할 명절특집이다.

노동자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이십대의 태반이 실업자라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브라운관 안에서만 아무리 웃고 떠들어봐야 의미가 없다. 비정규직 어머니, 아버지들은 어떻게 명절을 보내고 있을까? 청년실업자들의 아픔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들을 다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정 민족의 명절에 값하는 특집일 것이다.

상업적인 재미는 원래 잘 하던대로 오락프로그램을 내보내면 된다. 대신에 억지 특집은 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케이블 TV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신에 범국민적 명절에 맞게 국민적 아픔을 조명하는 특집을 만들자. 이렇게 특집과잉이 사라지고 정규편성 오락물과, 약간의 예능특집, 그리고 약간의 공공적 특집이 어우러질 때 차분하고 의미 있는 명절 지상파 방송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