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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계명교양총서 115선)- 헤로도토스 역사

헤로도토스(Herodotus)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 관한 글인 ‘역사’를 쓴 사가이다. 그는 기원전 484년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출생했고,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기원전 460년대 독재자 리그다미스에 반대하다 추방당해 사모스 섬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455년 경 그는 고향에 가서 다시 한 번 독재자 타도 운동에 동참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료 시민들의 질시를 느껴 조국을 떠났다. 기원전 454년 이후 그는 이집트와 바빌론을 포함한 유프라테스 강 유역, 마케도니아로 여행했다. 기원전 447년 경 아테네로 이주, 아테네 정치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기원전 443년 경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인 이탈리아 남부의 투리이로 이주했다. 그는 기원전 420년대 중반 투리이나 마케도니아, 혹은 아테네에서 사망했다. 헤로도토스는 사모스 섬에서 있으면서 ‘역사’를 구상했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투리이에서 이를 완성했다.

‘역사’는 헤로도토스 자신이 직접 탐구하여 쓴 글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이고, 주제는 이들이 싸우는 일, 즉 페르시아 전쟁이다. 서술 시기는 페르시아를 강국으로 만든 기원전 559년 키로스의 치세부터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가 세스토스에서 패배한 시기까지 80년의 기록이다. 당시 소규모 국가들의 연합인 그리스군이 강국이었던 페르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둔 사건은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헤로도토스 자신이 탐구한 것을 공포한 글이 ‘역사’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전체 한 권으로 서술했다. 기원전 2세기의 학자 아리스타르코스는 헤로도토스의 글에 주석을 붙이면서 9권으로 나누고, 각 권에 뮤즈의 이름을 붙였다. 1권은 헤라클레스 가문의 왕위를 찬탈한 기게스에 대한 보복으로 그 5대째인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의 키로스에게 패망하는 사연을 담고 있다. 2권과 3권은 키로스의 아들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 에티오피아 원정, 캄비세스의 악업과 사망, 다레이오스의 즉위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3권 뒷부분과 4~6권은 다레이오스의 바빌론 재정복, 스키타이 원정, 리비아와 트라키아 정복, 이오니아 밀레토스의 반란과 진압,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원정, 다티스의 그리스 원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7~9권에는 다레이오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크세르크세스가 부왕의 복수를 위해 일으킨 3차 페르시아 전쟁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적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헤로도토스가 밝혀낸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오만과 신의 징벌이었다. 밀레토스의 반란을 도와주었던 아테네에 대한 페르시아의 복수와 야심, 대군을 믿고 승리를 장담했던 페르시아 왕의 오만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크세르크세스가 폭풍을 일으켜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다리를 파괴한 바다에게 300대의 채찍 형을 가하면서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를 건너갈 것”이라는 ‘야만스럽고 불손한 말’은 그의 오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전쟁이 페르시아의 패배로 끝난 이유는 왕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시에 ‘거짓말쟁이’라는 별칭도 얻고 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는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무수히 들어있다.”고 말했다. 헤로도토스가 비난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직접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관찰·탐문해 썼다는 이야기가 거짓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비난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방대한 자료가 있는 상황에서 비교, 비판할 여지가 많았으나 당시 지리적·경제적 여건상 자료 수집도 어렵거니와 이를 비판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자료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헤로도토스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은 그가 ‘서구우월주의자’라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차이로 부각시킨 것은 자유와 노예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리스인은 자유를 누리고 그로 인해 최강의 전투력을 유지하지만 페르시아인은 전제적인 왕 휘하에서 노예상태로 어쩔 수 없이 전쟁하므로 전투력이 떨어진다고 묘사했다. 헤로도토스가 서구우월주의자라는 비난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각자가 가진 고유의 가치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 직후 번영하는 아테네에 머무르면서 친그리스적인 정서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공정한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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