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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 (계명교양총서 115선)-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 이전의 철학도 지식과 진리에 관해서는 많이 다뤄왔으나,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야 지식에 관한 본격적인 학문, 즉 논리학이 탄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언제나 이미 존재와 관련한다. 따라서 그의 논리학은 형이상학과 관계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탐구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동시에 존재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도 탄생시켰다. 그는 윤리의 문제는 곧 행복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언제나 추구하는 이 행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즉 선을 이루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잘 사는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은 어떤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며,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이자 최고선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른 것을 이해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있을 당시 행복의 통념은 부나 명예나 쾌락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한 이러한 통념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먼저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궁극목적이 될 수 없다. ‘쾌락’ 역시 궁극목적이 아니다.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에 가까운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이다. 또한 쾌락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 따라서 쾌락도 궁극적인 행복일 수 없다. ‘명예’ 역시 마찬가지다. 행복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없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인 입장에 있기에, 즉 타자 의존적인 것이므로 개인의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당대의 통념은 명예 등의 것을 행복의 내용으로 삼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인간은 행복해지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이른바 ‘기능논변’을 끌어들인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해주는 능력 혹은 기능을 소유한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삶을 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행복이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잘 수행되는 것, 즉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티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덕이란 주어진 기능을 발휘할 기회가 오면, 언제나 그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품성상태를 말한다. 그에게 덕은 자신 속에 ‘잘 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올바른 행동을 지속적으로 잘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행복은 인간 고유의 기능을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탁월하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품성 상태, 즉 덕에 따른 활동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강조한 ‘중용’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성을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중간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 절제의 덕은 인색과 낭비의 중용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중용은 단순한 양 극단의 가운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각자 자신의 상태와 상황에서 찾아가야 하는, 평생에 걸쳐 행해야 할 윤리적 과제이다. 이렇게 덕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의 기능이 가장 잘 발휘되며, 그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윤리적 중용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중용, 각자가 처한 개별적 상황에서의 중용을 의미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덕의 형성’이다. 올바른 성품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윤리학은 바로 이러한 덕의 형성과 올바른 성품을 기르기 위한 학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학은 덕의 본질과 성품에 관한 이론적 설명을 넘어, 덕의 형성을 안내할 수 있는 실천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크게 ‘지성의 덕’과 ‘성품의 덕’ 두 가지로 나눈다. 지성의 덕은 가르침에 의해, 성품의 덕은 습관에 의해 획득된다. 윤리, 행복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것은 성품의 덕이다. 지혜·용기·절제 등의 덕목들이 성품의 덕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윤리와 관련되는 덕들은 성품의 덕이며 그것은 지성의 덕과 구별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덕에 대한 ‘앎’(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알고 있는 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실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지성의 덕이 윤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지성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치 눈을 감고 움직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토록 윤리적 행위와 관련된 지성의 덕으로서의 ‘실천적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 알게 된다. 실천적 지혜 없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 실천적 지혜는 단적으로 말해서 ‘잘 사는 것과 관계된 문제들을 잘 숙고하는 능력’이다. 즉 행위의 사태와 실천의 영역에서 무엇이 이익이 되고 좋은 것인지를 헤아려서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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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