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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목요철학원 논문 초록 ‘향가: 사무치는 말들’ - 향가의 사무침으로 되돌아본 문학교육


1. 아득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남아 전하는 향가는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더 전에 부르던 노래들이니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 노래들과 우리 사이에 끼여 있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를 감싸고도는 급박한 말들도 다 새겨들을 겨를이 없는 터에 그토록 아득한 시대의 노래를 왜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고전이니 인문이니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은 또 왜 귀담아 듣고 읽어야 하며 알아야 하는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천 년 전에 사람 살던 모습이 오늘날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시절에는 전자며 전기의 개념도 없었을 터이니 오늘날의 사람 사는 방식과 비슷하게는 살았는지도 알기 어려운 노릇이다. 박물관의 이런저런 유물들이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삶의 실상이며 그 시절의 노래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책임이며 필요는 있는 것일까도 생각해야 마땅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가도 분명하게 해두어야 옳다.

그에 대한 답을 두 가지로 요약해 두고자 한다. 하나는 우리가 오늘날 껴안고 고민하는 문제들을 옛날 사람들도 이미 다 생각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살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과거뿐이기 때문이다.

향가를 생각하는 관점을 이렇게 설정하고 보면 천 년도 더 전에 즐겨 불렀다는 노래를 21세기의 첫 자락에서 굳이 다시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좀 더 분명해질 수 있다. 그것은 ‘신라인’이 무엇을 어떻게 노래했던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거나,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해답으로 가는 도움말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 사무침의 정체

사전에 따른다면 ‘사무치다’는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표준국어대사전)로 풀이되는데 옛말로 ‘ㅅㆍㅁㆍㅅ다’[훈민정음]와 ‘ㅅㆍㅁㆍㅊ다’[석보상절]를 떠올리게 된다. 이 말이 사용된 이런저런 사례들을 통하여 ‘사무치다’는 ‘깊이 스며듦’이나, 바꾸어 말하면 ‘통달(通達)’과 비슷한 말임이 드러난다. 이를 근거로 ‘사무침’은 결국 이해와 감동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을 뜻한다는 이해에 이르게 된다.

향가가 이처럼 사무침과 관련이 깊다는 증거는 노래마다 그 관련 기록에서 다 나타난다. 기록한 일연(一然)의 생각이 많이 담겨 있겠지만 전혀 허무맹랑한 기록이라고는 하기 어렵다는 점을 전제하고 보면 사무침의 성격과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노래가 일으킨 변화라는 점을 눈여겨본다면 어느 노래도 다 공통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향가는 그 한 편 한 편이 모두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쳐’ 변화를 일으키는 노래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를 달리 말해서 통달, 이해, 그리고 감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향가를 가리켜 ‘사무치는 말들’의 양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시니 노래니 하는 것은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자취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향가가 어째서 그토록 사무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할 차례다.


3. 사무침과 욕망의 길

사람이건 귀신이건 상대방을 감동하게 만들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꿔 생각해 본다. 이럴 때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사무침에 이를 수 있었는가’로 압축할 수 있다. 여기서 관심사가 되는 두 가지 요소는 ‘무엇’과 ‘어떻게’가 된다.

‘무엇’을 ‘내용’이라고 바꾸어 놓으면, ‘향가의 내용적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분류가 가능하겠으나 일반적으로 노래가 칠정(七情)의 세계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는 점에서 보면 향가의 내용 또한 그 범주에 든다는 것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향가를 칠정의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는 일곱 항목에 두루 분배하는 분류를 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그런 노력은 향가 또한 이 세상 사람의 노래 그것이라는 당연한 해석적 결말에 이르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칠정 가운데서도 노래는 주로 욕(欲)의 세계와 관련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생각하면 향가의 내용적 지향도 어느 정도는 드러날 수가 있을 듯하다. 욕망이 ‘삶의 동력인가, 괴로움의 뿌리인가’(박찬욱 기획, 운주사, 2008)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을 능력은 없지만, 인간의 존재 근거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요소가 욕망임은 분명하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근원적 요소인 욕망이 바로 향가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어 의미가 깊다.


4. 사무치는 삶을 위하여

향가의 사무침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이제 학교의 문학교육까지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람과 다른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언어의 유무다. 말이 있었기에 인류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것들을 지배하며 살 수 있었다.

걱정은 문학교육이 이런 근본을 거스르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누구라도 다 느끼고 아는 바이겠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는 문학과 함께 성장한다. 그런데 학교에 입학하면서 인간적 불행은 시작된다. 문학이 이해와 발견의 기쁨 그리고 창조의 흥분을 벗어나 점점 메마른 설명의 대상으로 변모하다가 그 다음에는 가혹한 암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결과는 문학 기피증이라는 참혹한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이러한 문학교육의 패러다임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문학과 함께 성장하고 문학과 함께 생활하며 문학과 함께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길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자면 문학은 지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사무침’의 대상이자 방법이어야 한다. 나는 그 길의 한 가닥을 오늘날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감정이입(empathy)’에서 찾고자 한다.

왜 천 년도 더 전의 아득한 노래를 오늘날의 우리가 굳이 생각하고 물은 데 대한 답을 이제 여기서 찾고자 한다. 우리가 꿈꾸고 고민하는 모든 것을 수천 년 전에 이미 다 했었더라는 이해, 그리고 그것을 매우 일상적인 말로, 내가 남의 처지가 되어 사무치는 세계 - 그것이 바로 향가를 이해하려는 이유라고 말하고자 한다. 무릇 사람이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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