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계명대와 함께한 시간으로만 봐도 내가 계명대 60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인 것 같다. 학부 때부터 캠퍼스에 머문 시간을 다 합쳐도 십오 년이 안 되는데 30년, 40년 넘게 계명대와 동고동락해 온 분들이 많지 않는가. 원고 청탁을 제때 거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고민했다. 그 와중에 내 머리를 맴돈 질문 하나. 계명대 60년을 이끌어온 하나의 정신이란 뭘까? 정신의 외화, 대학 캠퍼스란 결국 어떤 정신의 외적 형상이 아니겠는가. 해거름에 나는 저 질문을 화두인양 끌어안고 아담스 채플을 오르내렸다. ●계명정신과 나무오월의 한 중간, 학교에서 가장 높은 채플에서 내려다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나무다. 성서 캠퍼스에만 6천 그루가 넘는 나무가 있다니 오죽하겠나. 퍼뜩 나무에서 계명정신과 유사한 이미지가 보였다. 크든 작든 ‘땅에 뿌리를 내리되 하늘을 지향하며 옆으로 두루 덕을 끼치는 생명 존재’, 이것이 내가 이해한 나무다. 진리든 정의든, 아니 사랑까지도 모두 이 안에 포섭되어 있지 않을까? 계명 60년의 역사란 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움직인 사람들의 흔적이고, 또 그들이 세우고 가꾼 캠퍼스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싶다.
싱그러운 오월, 이번엔 남문을 통해 학교로 들어가 보자. 고개를 들면 왼쪽엔 자연대, 정면엔 인문대, 오른쪽에는 KAC가 보인다. 나무에 둘러싸여 건물의 윤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헤겔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잘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되레 잘 인식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무에 둘러싸인 세 건물의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인식의 영역을 과학이라 하든 인문학이라 하든, 혹은 국제교류라 하든, 그 모든 성취가 나무의 보편적인 은덕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지향하며 옆으로 두루 덕을 끼치는 나무, 자고로 훌륭한 인격은 나무와 닮았다. 저 세 건물은 그러한 인물을 기념하고 있다.백은관, 1982년 성서 캠퍼스에 처음으로 들어선 건물로 자연대의 이름이다. 백은(白恩)은 선산 출신의 최재화 목사의 호이다. 최재화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일제의 침탈에 맞서 독립투사로 무장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목회의 길로 접어들어 지역 교계의 지도자로 크게 활약했다. 목사(牧師)란 양을 기르는 사람, 같은 논리로 최 목사는 교육에 뜨거운 사명감을 발휘했다. 계명대 설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
55만 평에 달하는 성서캠퍼스,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가 있다. 남문, 정문, 동문, 이 세 문이 북쪽의 궁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캠퍼스로 들어가는 길이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내게 매일 이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적지 않은 즐거움이다. 성서 계명대의 건축물에 대해 네 번의 글을 써야하는 내게 떠오른 키워드가 바로 이 캠퍼스의 문이다. 80여개의 건물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착안한 것이다. 네 개의 문이 여는 길을 따라가며 내 시선을 끄는 건물을 하나씩 정하기로 했다. 자의적이지만 나름대로의 기준이다. 군자대로행, 먼저 정문으로 들어가 보자. 대리석 기둥의 웅장한 문을 지나면 멀리 궁산 아래 적벽돌로 된 장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학교에서 가장 큰 건물, 지하 2층 지상 7층에 6,538평의 동산도서관이다. 대학의 심장 도서관이 정문에서 일직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캠퍼스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구도가 뭘 말하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계명대 도서관의 역사는 유구하다. 최초의 도서관은 1958년 대명동에 준공한 바우어기념도서관이다. 1980년에는 720평의 저 라이브러리가 5,103평의 장엄한 동산도서관으로
대명동 캠퍼스 본관 앞에는 광장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빌라도광장. 아니, 빌라도라니?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발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한 로마 총독이지 않나. 사도신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저 빌라도에게 고난까지 받았다. 그런 이방인의 이름이 왜 기독대학의 본관 앞을 차지하고 있는가? 내막은 이렇다. 그것은 로마문화를 대변하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 하나에 있다. “진리가 뭐냐 Quid est veritas?” 심문하라고 잡아온 죄인에게 진리를 묻다니!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일 것도 없이, 인간에게는 앎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이 있다. 이 ‘인간’의 제 일 반열에 대학인이 있어야겠다는 것,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나라’를 꿈꾸는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이 빌라도 광장의 우측에(본관을 마주한 상태에서) 동서문화관이 있고 좌측에 노천강당이 있다. 그 구도가 본관과 함께 삼각형을 이룬다. 밑변의 양 꼭지점을 이루는 문화관과 노천강당은 의미상으로도 무관하지 않다. 전자는 동서고금의 문화를 탐구하는 연구관이고 후자는 문화를 형상화하고 실천하는 무대다. 문화는 사유와 이론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삶의 적나라한 현재성이어야 한다.지하 1층, 지상 5층의 동서문화관은 1977
필자는 80년대 6-7년을 대명동 캠퍼스에 살다시피 했다. 학사와 석사를 여기서 마치며 3S(Study,Sport,Sarang)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타지로, 해외로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대구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2008년에 돌아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대명동 캠퍼스였다. 청춘의 고향집 앞에서 만감의 교차를 제어하기 어려웠다. 파란만장한 모험을 겪고 20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오디세우스의 감회가 그랬을까? 페넬로페가 수많은 구혼자에게 시달릴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듯이 대명동 캠퍼스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실 멀리 떠나 있는 동안에도 캠퍼스의 전경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영화나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계명대의 건물이 아름답고 조경이 탁월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켜켜이 쌓인 선각자들의 정신과 열정의 흔적을 읽어내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계명대 60년의 역사는 대명동 캠퍼스 본관에서 출발한다. 본관은 정문으로 들어가 가장 높은 곳으로 따라가면 나온다. ‘저 높은 곳으로’의 지향성을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인 빌라도 광장에 들어서면 2층의 T자형 평면 건
동산동에 있는 계명대 동산의료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남쪽 주차장 옆에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이 하나 있다. 달성로를 사이에 두고 서문시장과 마주하고 있는 3층 건물을 말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보다 강렬한 빛깔의 적벽돌 벽이다. 이름하여 제중관, 구관 또는 구병동이라고도 하는 이 건물은 1899년 약전골목의 한 초가집에서 시작한 제중원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보여준다.제중관은 동산기독병원 2대 원장이었던 플레처(Archibald Fletcher)의 주도로 건축된 것이다. 미국에서 건축비를 모금할 때,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할 유일한 기독병원”이 될 것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내걸었다. 3만 5천 달러를 모금한 플레처는 바로 건축에 착수했다. 한국에는 서양식 건축에 능한 사람이 없었는지 중국의 기술자를 썼다. 1931년에 제중관이 준공되면서 입원병상은 80개로 늘어났고 한국인 의사도 채용되어 메스를 잡았다.원래는 건물 중앙에 현관 포치가 있었으나 3호선 지하철 공사 때문에 따로 떼어 뒤쪽 청라언덕에 이건해 놓았다. 이 포치의 정면에는 ‘since 1899’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제중관은 현재 검사실, 의사당직실, 중앙수술
역사는 시간의 흔적이다. 시간의 흔적을 추적해보려면 공간적 매개가 필요하다. 기실 공간이 전제되지 않은 시간이란 표상하기도 힘들다. 인간은 땅 위에 집을 지으며 역사를 만들어왔다. 계명대의 역사 또한 계명인의 집을 지으며 발전해 왔다. 계명대 60년의 역사는 캠퍼스 안에 구축된 크고 작은 건축물에 배어있다. 건축을 예술로 본다면, 건축만큼 실용성을 미의 바탕으로 깔고 있는 현실적 예술은 없다. 이러한 건축미학이 계명대 캠퍼스만큼 잘 구현되어 있는 경우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개교 60주년을 맞아 계명의 건축물을 둘러보며 그 속에 침윤되어 있는 계명의 역사를 추적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이에 나는 곧장 과거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한 시점으로 시간여행을 감행한다. 그 시점은 2015년하고도 가을쯤, 성서 캠퍼스의 남쪽 의과대학 아래로 지하 5층에 지상 20층의 장엄한 건축물이 서 있다. 대구의, 아니 한국의 의료사에 새로운 장을 열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신축 건물이다. 이 웅장한 의료원의 존재를 심상에 담고 나는 다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 그리고 장장 116년 전 약전골목에 있는 한 초가집에 이른다.그러니까,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역사는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