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시우스는 판자로 만들어진 배(T)를 갖고 있었다. 배가 낡아가자, 그는 건선거(배의 수리 또는 검사 장소) ㉮에서 T의 낡은 판자를 새 것으로 교체하는 한편, 낡은 판자를 모아 건선거 ㉯에서 새로운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의 배는 모두 새로운 판자로 대체되었고, ㉯의 배는 모두 낡은 판자로 건조되었다. 최초의 배 T와 동일한 것은 ㉮의 배인가 또는 ㉯의 배인가?” ‘테시우스의 배’라는 이 역설은 “동일성의 기준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제기한다. 만약 T 전체가 단번에 새로운 배로 대체되었다면 더 이상 T는 없겠지만, 위의 사례는 T의 부품들이 서서히 대체되므로 이런 문제가 생긴다. 물질적 측면만이 고려되는 무생물과는 달리 인간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인간은 정신(특히, 기억)과 신체의 특징을 가지므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동일시하는 기준’은 그것들 가운데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찾아야 한다. 세포들이 계속 생성소멸하고, 또한 새로운 공기와 음식물의 섭취/배출을 통해 신체의 구성요소는 변한다. 따라서 동일성의 본질적인 요소가 신체적 지속성은 아닌 것 같다. 한편, 영화 ‘여섯 번째 날’에서는 사람이 죽
우리 지식의 대부분은 과학적 지식이며, 과학적 지식은 개별적인 관찰과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보편적인 법칙과 이론을 이끌어내는 귀납적인 지식이다. 소박 귀납주의자는 아래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개별적인 관찰들로부터 일반화된 결론의 도출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1) 일반화의 토대를 이루는 관찰의 수가 많아야 한다. 2) 관찰은 다수의 지역이나 환경 등의 다양한 조건하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3) 어떤 새로운 관찰도 기존에 도출된 보편적인 법칙과 상충해서는 안 된다. 1)과 2)는 얼마나 ‘많은 수의 관찰’이고 또한 얼마나 ‘다양한 조건들’인지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철학자 러셀(1872-1970)은 특히 조건 3)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새로운 집으로 팔려간 귀납주의자 칠면조는 비와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9시면 주인이 먹이를 준다는 사실을 3년여 동안 관찰하고는 ‘주인은 아침 9시에 먹이를 준다’는 결론을 내린다. 3년이라면 제법 오랜 기간의 관찰이고 또한 눈이나 비가 오는 등은 제법 다양한 조건이다. 그러나 칠면조가 결론을 내린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주인은 먹이를 주는
늦은 밤, 나는 한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괴한들에 의해 어떤 병원으로 끌려간 아들을 구하러 같이 가달라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여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몇 명의 의사들이 수술대 위에 놓인 아들의 뇌에 전선을 연결하고는 단지 속에 그 뇌를 넣는다. 한 의사와 눈이 마주친 나도 수술실로 끌려들어 간다. 그 의사는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나요?”라고 묻는다. “혹시 내게도 뇌수술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답하자, 그는 껄껄껄 웃으면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뇌는 이미 저쪽의 단지 안에 있거든요. 당신이 오늘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전기 자극에 의한 것이죠.”라고 말한다. 이것은 펜필드의 ‘단지 속의 뇌’라고 알려진 역설로서, 여기에서 ‘나’는 단지 속에 담긴 뇌에 불과하며, 나의 일상적인 경험은 그 뇌에 가해진 전기 자극에 불과하다. [이 내용은 영화 (1999)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 네오가 자신의 삶이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공간에서의 거짓된 삶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해 싸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우리는 종종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불확실성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는 변화(또는 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란 착각에 불과하며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주에 빈 공간이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우리의 경험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물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며, 따라서 공간이 없으므로 장소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장소운동이 ‘모든’ 변화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주장을 반박할 수도 있다. 한편, 그의 제자인 제논의 역설들을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1)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 거북이의 속도가 아주 늦기 때문에, 거북이를 먼저 출발시킨다.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지점 A에 도착할 때 거북이는 다른 지점 B로 이동하고, 그가 B에 도착할 때 거북이는 또 다른 지점 C로 이동하는 식으로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거북이를 앞지를 수가 없다” (2) “운동 중인 화살은 공간의 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정지해있는 것이다. 따라서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있다” (3) “겨울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