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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돌 맞은 목요철학 인문포럼(1)] 교수들의 논쟁, ‘철학적 사유’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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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시작된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당시 대학사회의 지적 욕구를 수용하고 지역사회에서 철학적 사유의 장을 조성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명대신문>은 목요철학 인문포럼 40년사를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엮은이 말

 

●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사회로

1970년대 말부터 우리학교 철학과는 유럽 각 지역과 미국, 그리고 대만으로부터 온 다양한 철학전공의 신진학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젊은 40대의 교수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가지고 선후임자 없는 철학과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한 자리에 모였으니 시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하게 표현하면 젊은 신진교수들이 학생들 앞에서 제각각 잘났다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철학적 이념논쟁(?)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이미 몇몇 교수들은 지역의 타 대학으로 이적한 상태였지만 1980년 미국에서 분석철학을 전공한 김영진 교수가 철학과에 새로 임용되면서 미국의 새로운 언어분석학을 가지고 유럽관념철학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으로 철학과를 흔들어 놨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바로 그해 1980년 1학기 말에 나는 학과 교수들이 모인 자리(변규룡, 김영진, 백승균)에서 “2학기부터 오전 오후의 수업은 정규교과과정에 따라서 정상수업을 하고, 방과 후 「철학세미나」를 통해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자신이 내건 철학의 주제를 한 시간은 발표, 한 시간은 토론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변규용 교수와 김영진 교수가 동의하여 연장자 순서로 마침내 1980년 10월 8일부터 「목요철학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1980년’이 갈림길이었다. 강좌의 방향은 흥미 위주가 아니라 학문위주로 가되 정치경제로 할 것인가 혹은 문화사회로 할 것인가 이었다. 우리는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사회로의 길을 택했고, 그 후 대학 내에서 30년 그리고 대학 밖 사회에서, 즉 시립중앙도서관에서 10여 년, 모두 40년을 ‘문화사회’라는 한 길로 달려왔다. 물론 대학 내에서 30년 동안 이런 저런 경우 정치적 성향의 강사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 열띤 토론의 장, 목요철학 세미나

1980년대의 대학가에는 다양한 지적 욕구가 넘쳤다. 아쉽게도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공간과 주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교수들의 자기주장에 대한 비판과 토론에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역시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교수들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청강할 뿐이었다. 철학과에서마저도 교수는 판서하고 학생은 필기하는 것이 당시 대학 강의의 전부였을 정도였다. 따라서 강의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때로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대학 전체가 조용할 수밖에 없었고, 조용한 대학이 학구열이 높은 일류대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철학 자체는 암기과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학교의 「목요철학 세미나」는 대학사회에서 돌풍을 일으킬 만했고, 또한 교수들의 학문적 역량과 지적 여건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의 교육부장관(이규호)이 전국 대학총장회의에서 “오늘날 지방대학의 교수 구성은 서울소재의 대학들 이상임”을 강조하면서 우리학교 철학과를 거명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실제 「목요철학 세미나」 행사로 대명동 캠퍼스의 수산관 대형강의실에서나 시청각실에는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복도까지 가득 매우기도 했고, 열띤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80년대 당시 대학의 지적 호기심은 이미 2000년대 우리사회 전체의 미래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이의 촉매 역할을 「목요철학 세미나」가 상당부분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목요철학 세미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철학적 사유의 보편화을 위해서 「철학의 대중화와 대중의 철학화」를 모토로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했고, 강좌주제들과 강사들도 순수철학을 넘어 응용분야의 사회, 윤리, 문화 일반, 심지어는 생명복제 문제와 포스트모던 문제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 당대 지식인들과 40년을 함께해온 목요철학

그러니까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1980년 우리학교 철학과의 40대 교수들 간의 철학적 논쟁으로부터 시작했으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와서는 철학적 사유를 보편화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데 힘썼고, 2010년대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계명-목요철학원’이 우리학교의 공식기관으로서 설치됨으로써 『목요철학 세미나』를 공개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목요철학 세미나』는 3원화하여 청소년을 위한 「철학인문강좌」와 대학인을 위한 「목요철학 콜로키움」, 그리고 시민대중을 위한 「목요철학 인문포럼」을 정례화 하게 됐다. 특히 『목요철학 인문포럼』에는 국내학자들로서 염무웅, 김기태, 한종만, 이완재, 김하태, 정대현, 송기숙, 무관(無觀)스님, 현응스님, 이완재, 손봉호, 소흥렬, 한우근, 윤사순, 정달용 신부, 장회익, 김형효, 황경식, 엄정식, 박이문, 김남두, 윤평중, 정홍규, 조동일, 김지하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외국인 학자들로서는 Geertsema교수(140회 민주주의와 책임사회), 크리스티안 슈테터(183회 칸트와 비트겐슈타인·독일 Aachen대), 유르겐 하버마스, 칼 오토 아펠, 빅토리오 회슬레,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헤어만, 피터 싱어 등 외국석학들도 함께 발표와 토론에 참여한 가운데 현재까지 4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결강도 없이 진행하여 옴으로써 이미 전국의 언론매체에서는 ‘대구의 자랑거리’, ‘대구의 정신문화’, 심지어 ‘우리시대의 금자탑’이라는 과분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 언론사에서는 여전히 “그들이 있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없다”라고 했는가하면, “대학의 한 학과가 그토록 오랫동안 세미나를 가져온 것은 전례가 없고, 여건이 열악한 지방대학에서 철학세미나를 28년이나 계속해 왔다는데 경탄을 금할 수 없다”고도 했다.

 

● 목요철학 세미나의 역할

1980년 시작에서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목요철학 세미나』의 주제들은 처음엔 철학과 교수중심으로 변규용, 백승균, 김영진, 하기락, 임수무 교수 등, 그리고 한자경, 이진우, 강영안 교수 등의 주축이 되어 대체적으로 서양철학 영역이었으나, 차후엔 사회, 문화, 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내용들이었고, 국민윤리학과에서 철학과로 넘어온 임수무 교수와 홍원식 교수 등의 역할로 동양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 대두됐으며, 그밖에는 국내외 여러 학자들에 의한 인문학 일반에 관한 주제들과 함께 사회, 종교, 교육 분야 등 인문학의 다양한 다른 영역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 『목요철학 세미나』는 대학과 사회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학문의 경계성마저 사라진 포스트모던시대의 현실에서 대학공간에만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대학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한 새로운 사회를 향해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적 사유 활동을 체계적으로 대학 밖의 시민들과 함께 공유함이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안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하는 대학인들의 사고가 중요했지만, 대학 밖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의 삶이 더욱 중요했다. 또한 대학 내에서는 엄격한 전문성을 띈 철학 세미나를 통한 교수 자신들의 자기주장이 통했으나, 시민사회에서는 실천적 삶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각기 다른 계층의 소통의 장이 필요했다. 때문에 대학 밖의 사회에서 필요한 형식은 ‘자기’주장이 가능한 강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광장이어야 했고, 인간 삶의 현장을 체계적이고 다원적으로 바라보고, 상호 소통이 가능한 형식이어야 했다. 비로소 지적 독자성의 자기주장에서 사회적 실천성의 ‘우리’주장이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패턴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실천적 개방성의 공간에서도 자기주장은 열려있어야 하고 따가운 비판도 열려있어야 하며, 따라서 사람도 열려있어야 한다. 열려있는 삶의 현장에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현실적 앎이 우선이고 더불어 지적 이론으로 승화하는 데까지 이루어 내야했었다. 이에 삶과 앎, 그리고 있음의 존재론문제까지도 다함께 상정할 수 있는 시민적 담론의 장에서 철학적 사유를 통해 비판적 시민의 문화의식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해주기를 우리는 바랐다. 이러한 문화사적 사유능력은 결국 사람됨의 가치와 자유함의 가치를 위한 사회적 인성실현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게 될 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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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다수결주의·합리주의 정치모델과 국가행복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정체 또는 퇴행이라고 볼 수 있는 위기 가능성의 징후가 많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낮은 신뢰도, 정체성이 없는 정당정치 등은 한국 정치의 낮은 제도화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 토대를 위한 사회적 기반의 붕괴와 민주주의 절차의 핵심인 정당체제의 역할이 실종된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한국정치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함의를 제시하기 위해 다수결주의와 합의주의 정치모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다수결주의는 말 그대로 다수의 뜻이 지배하는 정치원리를 의미한다. 이 원리는 다수를 점한 세력에게 정치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며, 일사분란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과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수결주의는 다수를 점하는 정치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에 야당은 다음 선거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침묵해야 한다. 다수결주의는 이러한 면에서 매우 배타적이고 경쟁적이고 적대적이다. 다수결주의가 작동되는 가장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합의주의는 다수가 지배하는 정치원리라는 면에서는 다수결주의와 다를 바 없으나, 다수에 의한 지배를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