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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국정화, 정치 세력의 과잉 개입

바람직한 해결책 마련 위해선 학계와 교육계의 공론에 맡겨야

최근 분위기를 보면 정부는 기어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관철시키려 하고,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국정화를 총력 저지하려 나서는 모양새이다. 여론은 전체적으로 국정제 도입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장관은 ‘하나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게 자신의 소신이라면서 국정화를 강행할 태세이다.

애초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주장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파동을 거치면서 현 집권 여당 대표, 같은 정당 소속인 교육부 장관을 포함한 보수 정치 세력 일각에서 제기되었고, 그들과 연계된 소수 관변 학자들이 합세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외면받자 교학사 수준과 비슷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하나의 역사’만을 가르치게 하는 방안으로 국정제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정 교과서는 교육부 장관이 집필과 편찬은 물론 수정·개편 권한까지 갖게 된다. 집필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교과서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는 바뀔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

애초 국정제가 도입된 때는 일제 식민지배 때였으며, 해방 후 검정으로 바뀌었다가 유신 체제 때 부활한 것이다. 결국 국정제는 군국주의, 독재 권력이 역사를 권력의 입맛대로 가르치기 위해 도입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정 역사 교과서를 쓰는 나라도 대체로 사회주의 정권이나 독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들이다. 북한, 러시아, 베트남 정도가 국정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요 선진국 중에서 국정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없다. 베트남도 국정제를 폐지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우리식 용어로 표현하면 검정제, 인정제를 넘어서서 자유발행제를 시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국정제를 옹호하는 측 주장 중의 하나는 남북 분단 상황이기 때문에 통일적인 사관이 필요하고, 그래서 국정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전체주의 독재 체제이며, 그러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정제를 통해서 역사 인식을 통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도 북한을 따라가듯 국정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남한이 민주주의 체제로 북한에 앞설 수 있었듯이, 교과서 제도도 북한보다 우월한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

국정제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국가가 최고의 학자와 교육자들을 동원하면 중립적이고 훌륭한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교과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발상이다. 최고의 학자들이 모이면 제각각 자기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기 때문에 일관성 있고 통일적인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가 대표 드림팀에 의한 탁월한 교과서 집필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발상이다.

학습자, 학부모들에게 호소력 있게 들리는 주장의 하나가 국정 단일 교과서이면 학습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정제이기 때문에 입시 부담이 느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영어는 검정 통과 교과서가 20여종이 넘지만 교과서 때문에 입시에 부담이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검정 교과서에 공통으로 다루어지는 내용이 출제되기 때문에 입시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검정에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가 8종이라면 5~6종 정도에 공통으로 포함되는 내용이 출제된다. 오히려 국정 교과서 한 종류밖에 없다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시시콜콜한 내용까지도 모두 암기해야 되는 상황이 되어 학습 부담이 가중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이 생명이다. 다양한 학교와 학생이 있고, 역사에 대한 관심, 흥미도 다르다. 다양한 교과서가 있어야 역사 교사가 자기가 가르칠 학생에 맞는 교과서를 선택해서 가르칠 수 있다. ‘하나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발상 그 자체로 반교육적이다. 국정제로 간다면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사회가 낙후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는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국정제 논란은 정치권의 주장에 내둘려서는 풀릴 수 없고, 올바른 방향 설정도 기대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교육 논의에서 정치적 개입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헌법, 교육기본법이 천명하고 있는 대의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마찬가지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역사교육, 교과서 문제를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공론에 맡기는 것이다.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공론이 존중되어야 하고, 그 공론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보장된 교육,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 전문성, 자율성 확보를 위한 지름길이다. 교육부가 할 일은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외압을 막아주는 일관된 모습이다.

국정제는 수백 명의 역사학자, 수천 명의 역사교육자가 입을 모아 반대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국정화된다고 하더라도 국정화를 주장하는 측의 뜻이나 의도에 맞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혼란만 가중될 뿐 득이 없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정치적 외풍이 배제된 역사학계 교육계 중심의 ‘역사교육위원회’를 두어 역사교육을 논의하게 하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새겨 볼만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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