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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타임머신] 점거부터 단식까지…전쟁 같았던 등록금 협상

 

‘등록금 인상’이 화제가 되는 시대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현재 심의가 완료된 대학 134곳 중 133곳이 등록금 동결 혹은 인하를 결정했다. 134곳 중 인상을 결정한 대학이 1곳에 불과한 것인데, 등록금을 인상하면 국가장학금 및 재정지원사업에서 불이익을 받는 상황에서 이뤄진 인상이라 이목을 끈다. 이 대학은 입학금 인하에 따른 수입 감소와 학생 정원 감소 등을 고려해 등록금 인상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이 줄어든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0여 년 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의 주도로 시작된 ‘반값 등록금’ 운동이 일부 성과를 거두면서, 정부가 등록금 인상률을 국가장학금 및 재정지원사업과 연계시킴에 따라 동결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같은 조치에도 한국의 대학 등록금 순위는 미국, 호주, 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높아 그 부담이 가볍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국가장학금도, 정부가 주선하는 대출도 없던 시대의 등록금은 대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당시 등록금 협상은 차라리 ‘전쟁’에 가까웠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대학이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 소를 팔아 세운 건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로  부담이 컸다. 그런데 해마다 오르는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교육환경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측이 제시한 등록금 인상안을 납득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대학은 운영에 필요한 예산 대부분을 등록금 수익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은 학생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등록금을 인상을 강행하는 경우가 잦았다.

 

’91년 3월 19일자 <계명대신문>의 “3천여 명 참가 속 등록금 환불투쟁 의결” 기사를 보면 이 같은 분위기가 확연히 드러난다. 당시 학교 당국은 학생과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등록금을 18% 인상한 고지서를 발부했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6.5% 인상”을 주장하며 총장실 및 경리과(현 예산팀)를 점거하고 40여 명이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등록금 인상 저지를 위한 임시총회에서 당시 총학생회장 문헌준(사회학·4) 씨는 “학우들의 단결투쟁 속에서만 6.5% 인상이 관철될 수 있다”고 강조했고, 장현덕(국어국문학·3) 씨는 “등록금 투쟁의 궁극적 목표는 학원자주화”라고 밝혀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12월부터 4월까지 5개월간 계속된 등록금 투쟁은 “등록금 15% 인상과 학생들의 학사운영 참여 보장”을 조건으로 마무리되면서 당초 목표인 6.5% 인상을 쟁취하지 못해 학생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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