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직 노동자, 배달노동자, 이주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택배기사…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이들의 ‘아무도 쓰지 않은 부고’에 눈길이 갔다. 전태일 열사 50주기의 꼭 하루 전인 11월 12일 〈서울신문〉은 올해 상반기 야간노동 중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부고로 1면을 빼곡히 채웠다. 1면을 둘러싼 검은 띠 안을 수놓은 무수한 ‘궂긴 소식’들은 슬프고도 가혹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에 홀로 분리수거를 하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경비원 이모씨는 일주일간 88시간을 일했다. 지게차에 깔려 숨진 콘크리트 생산 노동자 방모씨의 죽음은 어두운 작업환경과 보행자 전용 통로의 미확보, 현재 작업 지휘자 부재가 낳은 인재로 드러났다.
문득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말이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죽음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죽음도 그러했다. 초거대 기업집단의 수장이었던 그도 최후의 순간엔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추모하는 방식과 그의 죽음이 갖는 무게는 평범한 이들과 동등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마치 국가적 손실인 것처럼, 역사적 위인의 죽음인 것처럼 떠받들어졌다. 언론은 그의 부고를 전국 방방곡곡에 실어나르기 바빴고, 그러면서 ‘초일류 삼성’을 일군 뚝심의 사나이로, ‘혁신’을 주도한 기업가 정신의 발로로 추앙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든 것은 이건희의 ‘개인기’가 아니고, 혁신의 과실 또한 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것은 차라리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을 얻어 사망한 노동자들,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해야 했던 노동자들,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쌓은 금자탑에 가깝다.
이달 12일 정부는 전태일 열사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전태일 열사는 ‘아직 멀었다’고 하시겠지요”라며 노동존중이 실현되지 않은 현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정책과 입법으로 말해야 한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과 교원노조법 개악에 더해 사업장 내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등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노동법 개정안은 ‘노동존중’ 정부의 작품이다. 다분히 시혜적인 ‘노동존중’이라는 단어마저 노동자가 주변화된 채 오용되고 있는 사이, 정부는 전태일 열사의 상징성을 탈취했을 뿐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알맹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고, 열사에게 수여된 최고등급 훈장은 한국이 노동존중 사회로 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징표하지 않는다. 더는 전태일 이름 석 자가, 나아가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배세력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존재로 가벼이 여겨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5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전태일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전할 수 있을지, 아직도 입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