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에는 전쟁을 지휘한 권력자들의 얼굴이 없다. 캔버스를 채운 것은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와 파괴된 마을, 절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는 전쟁이 평범한 민간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지난 2월 이란 남부 미나브의 학교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폭격을 당했고, 이란 당국은 이 공격으로 1백60명이 넘는 민간인이 숨졌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도 민간인 사망자와 아동 피해, 학교·병원 파괴가 끊이지 않고 보고된다. 전쟁의 명분은 제각각이나 그 칼날이 향하는 곳은 결국 평범하게 살아가던 시민들이다.
문제는 전쟁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이다. 전쟁으로 민간인들의 참혹한 희생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음에도, 그 소식은 곧 전황, 유가, 주식과 같은 단기적 손익과 숫자의 언어로 빠르게 옮겨간다. 전쟁범죄, 인권침해와 같은 인도주의적 비극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정작 대중의 관심은 ‘우리 경제에 미칠 실리’에 더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전쟁의 영향이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경제적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희생’보다 ‘실리’로 맞춰질 때, 정작 전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일상을 잃는 일이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는 수혜 업종과 투자 전망을 따지는 이익의 문제로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피해는 국제 정세의 부차적인 현상으로 치부되고 만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의 본질인 ‘폭력’을 단순한 ‘변수’로 치환하여 그 책임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민간인 학살은 마땅히 법적·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할 범죄의 결과이지만, 손익의 관점에서는 시장을 흔드는 외부 충격이나 데이터로만 소비될 뿐이다. 전쟁의 실리적 계산이 인권의 가치를 앞설 때,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정당화되거나 묵인되는 현실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전쟁의 참상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알고도 그것을 너무 빨리 손실과 기회의 문제로 바꿔 읽으며, 비극에 분노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인권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는 데 있다.
21세기에도 민간인 희생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숫자로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민낯을 고발했듯, 오늘날의 전쟁에서 먼저 직시해야 할 것은 그 전쟁으로 누가 희생되고 있는가이다. 전쟁을 경제적 손익으로만 판단하는 순간, 민간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쉽게 휘발되는 정보로 전락하고 만다. 되풀이되는 민간인 희생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전쟁을 수치와 이익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소한의 시작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