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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계명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전아리(연세대학교 인문계열ㆍ1)

  • 작성자 : 계명대신문사
  • 작성일 : 2006-08-28 21:33:11

제26회 계명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입니다.

 

당선자: 전아리(연세대학교 인문계열ㆍ1)

 

 

제 26회 소설


팔월



여자아이는 찬물에 발을 담근다. 복사뼈에 녹지근하게 붙어있던 더위가 흩어진다. 일렁이는 발등 위로 달빛이 비친다. 개가 다가와 양은대야의 물을 핥는다. 뒷골목의 어둠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진흙층처럼 고요하다. 아이는 문턱에 걸터앉은 채 졸기 시작한다. 하루살이 몇 마리가 물 위로 떨어진다.

 

여자가 고무장갑 낀 손으로 아이의 등짝을 내리친다. 아이의 흰 민소매셔츠 등짝 위로 손 모양의 돼지핏물자국이 남는다. 아이는 빈 양은대야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냉동고 앞에 앉아 물을 부어둔 컵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여자는 쇼 케이스에서 돼지목살 쟁반을 꺼내 냉동고로 옮긴다. 냉동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냉기에 아이는 두피가 바짝 졸아붙는 듯 하다. 여자가 옮기려던 우족 하나가 쟁반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아이는 우족을 집어 냉동고 안으로 집어던진다. 여자의 손바닥이 아이의 머리통을 내리친다. 누군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불고기 한 근을 주문한다. 아이는 여자가 고기를 썰어 담을 동안 쇼 케이스에 기대어 서 있는 손님을 바라본다. 남자는 일주일에 서너 번 문 닫을 시간 즈음 가게를 찾아온다. 그는 불고기 혹은 삼겹살, 아주 가끔씩은 값싼 돼지족을 사가기도 한다. 아이는 남자가 가게를 찾기 전부터 그를 알았다. 그는 태양빌라 옆 주택의 반지하방에 산다. 빌라 놀이터의 미끄럼틀 위에 오르면 낮은 담 너머로 반지하방의 부엌 쇠창살이 내려다보인다. 남자는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가게를 나간다. 여자는 고무앞치마와 장갑을 벗고 바닥을 쓸기 시작한다. 아이는 장군이 벗어둔 갑옷과 투구를 치우는 졸병처럼 앞치마와 장갑을 개수대로 옮긴다. 앞치마에 얼룩진 핏자국을 수세미로 문지른다. 종일 저울이며 도마 위에서 시달린 행주도 더운 물에 불려 빤다. 실밥이 나달거리는 행주에서는 오래 묵은 핏물대신 가축들의 뒤엉킨 울음소리가 씻겨 나온다. 여자는 선지를 한 바가지 퍼내어 챙긴다. 아이는 내일 아침에도 밤새 끓는 물 속에서 응고된 선지 해장국을 먹게 될 것이다. 국물을 수차례 우려낸 해장국 뼈에는 연한 고깃점 대신 반지르르한 윤기가 돈다.

 

물을 채운 비닐장갑이 저울 위쪽에 매달린 채 느리게 흔들린다. 아이는 발가락을 만지작거린다.


놀이터 모래밭에는 대여섯 살짜리 사내애가 앉아있다. 그 곁을 지키는 노파는 한 손으로 파리채를 휘두르며 다른 손으로는 부채질을 해댄다. 여자아이는 슬리퍼를 벗고 모래밭을 걷는다. 모래는 용암처럼 뜨겁다. 사각지대의 놀이터를 담처럼 둘러싼 개똥나무에서 진한 풀비린내가 풍긴다. 아이는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미끄럼틀의 경사면을 오른다. 팔월 대낮의 주택가 골목에는 인적이 없다. 아이는 맨발에 붙은 모래를 털며 인중에 엷게 배인 땀을 빨아먹는다. 반지하방의 부엌 창문은 활짝 열렸다. 습해 보이는 어둠 속으로 언뜻 개수대가 보인다. 방충망이 쳐져 있지 않은 쇠창살 틈은 도둑고양이라면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폭이다. 아이는 문득, 부엌 창문 너머로 언뜻 사람의 움직임을 본 것도 같다. 사내애가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온다. 벗겨놓은 아랫도리에 토란처럼 매달린 고추가 흔들린다.

 

육절기는 바람소리를 내며 작동한다. 얇게 쓸려져 나오는 고깃점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갗위로 면도날처럼 얄팍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한기가 느껴진다. 여자가 냉동실로 들어가 새로 들어온 고기를 부위별로 나누는 동안 아이는 쇼케이스 속에서 삼겹살을 꺼낸다.

 

골목 어귀에 다다른 아이는 비밀스러운 것이라도 되듯 두 겹의 검은 비닐봉지에 담은 고깃덩어리를 건넨다. 아이보다 서너 살 위인 중학생 사내애들이 낄낄거리며 고기를 건네받는다. 매미 울음소리가 하늘에 얼룩진 구름을 긁어낼 듯한 기세로 뻗쳐오른다. 사내애 한 명이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넨다. 그들 무리가 남기고 간 바람에서는 쉰밥냄새 같은 땀 냄새가 난다.

 

쇼케이스 위에 지방질이 붙은 독일나이프가 놓여있다. 텔레비전에서는 퀴즈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가게 밖으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아이는 젖은 행주로 골절기와 육절기를 닦는다. 문갑을 개조하여 만든 간이침대 위에는 여자가 먹다 만 반찬들이 말라붙어간다. 여자는 돈을 벌 줄만 알지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 남편의 죽음 때와 같은 만약을 대비하여 돈은 무조건 모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그저 최악의 상황을 위해 살고 있는 듯하다. 뒷문으로 나갔던 여자가 다시 들어와 식사를 계속 한다. 아이는 선반의 양념통들을 내리고 기름때와 함께 엉겨 붙은 먼지를 닦아낸다. 가게 청소를 마치자 여자는 아이에게 천 원을 준다.

 

놀이터 옆으로 트럭이 주차되어 있다. 트럭 뒤편에는 신문지와 비닐천막으로 싸인 짐들이 실려 있다. 남자가 트림을 하며 대문을 열고 나온다. 그는 트럭에 올라타 천천히 담배를 피운다. 모래밭에 앉아있던 아이와 그의 눈이 마주친다. 남자가 차창을 바짝 내린다.

 

“덥지 않니?”

 

아이가 대답 없이 그를 올려다본다. 남자의 붉게 그을린 이마 위로 곱슬기 있는 머리칼이 철사뭉치처럼 드리워져 있다. 털어낸 담뱃재가 진눈개비처럼 흩어진다.

 

“이거 갖을래?”

 

그는 차 앞 유리 구석에 붙어있던 공룡모양 부직포 인형을 떼어낸다. 공룡의 뿔과 꼬리는 새까맣게 때가 탔다. 아이가 반응이 없자 그는 무안한 표정으로 인형을 도로 붙여놓는다.

 

“너희 가게 고기 맛있더라.”

 

아이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한다. 운송회사 사무실에 있던 미스 윤과 예정대로 살림만 차렸더라도 저만한 아이가 있었을 터였다. 남자는 미스 윤과 일 년간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내세울 만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내던진다. 곰팡내를 풍기는 에어컨 바람이 차 내부에 골고루 퍼져들기 시작한다. 아이가 빈 놀이터에서 나온다.

 

“아저씨 저기 살죠?”

 

남자는 아이의 턱짓이 가리킨 대문을 흘끗 돌아본다.

 

트럭이 골목을 빠져나간다.  아이는 에어컨 바람 속에서 공룡을 만지작거린다.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엿가락처럼 길쭉해 보인다. 남자는 정육점 앞에서 아이를 내려준다. 아이는 땀이 식은 보송보송한 얼굴로 가게 안에 들어선다. 간이침대에서 졸던 여자가 고개를 든다.

 

아이는 책을 편다. 모래밭에 서있는 어린 왕자의 발치에는 매끄러워 보이는 노란색 뱀이 있다. 노란 뱀을 사고 싶다. 칼날 끝에서 맥없이 생명 줄을 끊기는 우둔한 짐승들과는 달리 일순간 도마 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릴 것 같은 생물체. 약간 부어오른 듯 봉긋한 대가리를 들고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노란 뱀.


“청계천에 가면 있을지도 모르지.”

 

남자는 아이스크림을 깨끗이 빨아먹은 나무 막대기를 쥐똥나무 덤불에 던진다. 아이는 둥근 어항 속에 담긴 가느다란 뱀을 떠올린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이를 옆자리에 태운 트럭이 달린다. 주말의 동대문은 번잡하다. 아이의 목걸이 지갑 속에는 이만 원 가까운 돈이 들었다. 트럭은 벼룩시장 앞에서 멈춘다. 먼지 낀 도자기들과 조립식 망원경 사이를 누비며 남자는 땀에 달라붙는 티셔츠 자락을 떼어낸다.

 

파라솔 밑의 사내는 마이크를 들고 떠들어댄다. 광고가 재생되고 있는 화질 낮은 모니터 앞 쪽으로 보양식 깡통이 쌓여있다. 남자는 파라솔 아래 선 구경꾼들을 헤치고 들어간다. 사각의 대형 어항 속에는 세 마리의 굵은 뱀들이 엉켜 느릿하게 이동한다. 아이는 습기 찬 바위 아랫도리에 번진 이끼처럼 어두운 색의 뱀 비늘을 본다. 팔뚝에 혓바늘 같은 소름이 돋아난다. 무언가를 달이는 듯 끓어오르는 전기 주전자에서는 비리고 진득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아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두 시간 가까이 걷던 남자는 좌판에서 전동 면도기를 산다. 아이는 두유를 빨아먹는다. 종아리에 자꾸 엉겨드는 치맛자락을 잘라내고 싶다.

 

여자는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남편의 기일이 다가온다. 매번 장마가 시작될 즈음, 과일 값이 가장 오를 시기이다. 중랑천의 범람주의보가 내려지던 날 저녁 남편은 가게 문을 닫고 돌아오다가 승용차에 치였다. 여자는 석 달간의 식물상태 끝에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남편의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남편이 그간 투약했던 링겔액이 여자 자신의 목구멍 너머로 범람해 오르는 듯 했다. 아이는 세 살이었다.

 

아이는 끓어오르는 냄비 안에 수저를 꽂는다. 거품이 수그러든다. 칼국수 속에서 새끼손가락만한 멸치를 건져낸다. 여자는 음식을 깨지락거리는 아이를 본다. 김치를 잔뜩 풀어놓은 칼국수가 식어간다. 연속극에 넋이 나간 아이를 못 본 체하고 칼국수를 먹는다.

 

남자와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구리 동전 하나에도 쌍심지를 켜는 아이 주변의 어른들과는 달랐다. 늘 여유로웠고 그 여유를 담배 한 개비로 더욱 맛깔스럽게 태워가는 법을 알았다. 그다지 완벽한 대화상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친구가 생겼으므로 아이는 노란 뱀을 찾는 것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아이는 여자 몰래 고기를 덜어 중학생 사내애들에게 판다. 골목 한쪽에서 수거해가지 않은 음식쓰레기가 썩어간다. 사내애들이 좀처럼 돈을 건네지 않은 채 눈짓을 주고받는다. 그 중 한 명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너 돈 더 갖고 싶지?”

 

잠시 후 따라간 빌라의 지하 주차장에는 두 명의 사내애가 더 있다. 입술이 거무튀튀한 사내애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던진다.

 

“그럼, 게임 시작하자.”

 

사내애들은 아이를 주차된 자가용들 사이의 낚시의자에 앉힌다. 아이를 포함해 여섯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한다. 가위를 낸 사내애가 재빨리 보로 바꾼다. 가장 덩치 큰 사내애가 나서서 진 사람이 옷을 한 겹씩 벗기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아이가 걸친 것은 속옷과 원피스뿐이다. 아이는 들개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애들의 시선에 당황한다. 게임을 그만두겠다며 일어선다. 사내애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선 채로 욕지기를 내뱉는다. 가까스로 그 틈을 빠져나온 아이가 주차장 외부로 통하는 경사면을 오를 때다. 누군가 와락 달려들어 아이의 치맛자락을 들친다. 다른 하나가 재빨리 손을 뻗어 팬티 위로 아랫도리를 더듬는다. 발버둥을 치던 아이가 시멘트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사내애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아이는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거리며 지나는 남자가 보인다.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려 뒤를 돌아다본다. 도망간 아이를 어슬렁거리며 쫓아와 기웃거리던 사내애들이 슬그머니 돌아선다.

여자는 순무처럼 흰 아이의 허벅지에 멍이 든 것을 발견한다. 아이는 보조침대 위에서 불편하게 몸을 구부린 채 잠들었다. 여자는 텔레비전을 끄고는 아이 쪽으로 선풍기 바람을 돌려놓는다.


남자는 아차산 근교로 운송을 나갔다가 벌에 쏘였다. 운송된 물건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가게 주인과 운송회사 직원이 전화로 실랑이를 벌였다. 그 동안 남자는 질리도록 물이 오른 산을 바라다보았다. 늙은 등산객들 한 무리가 버스에서 내렸다. 그는 눈앞에서 성가시게 날아다니는 것을 무심코 휘저었다. 벌은 맹렬하게 달려들어 손등에 침을 꽂았다. 남자는 벌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벌의 몸뚱이가 뭉개져 아스팔트 틈에 낄 때까지 운동화로 짓이겼다. 가게 주인은 전화에 대고 트럭운전사에게서 술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운송회사 직원은 그의 땀 냄새라고 우겼다.

 

남자는 슈퍼마켓의 평상 위에 앉아 막걸리를 마신다. 아이가 곁에 걸터앉아 땅콩 껍질을 벗긴다. 귓밥처럼 도톰한 달이 떴다. 남자는 요 근래 씻지 못한 몸이 근질거린다. 술만 들어가면 살갗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듯 간지러운 목 언저리의 흉터를 긁어댄다. 트럭을 몰기 전에 지방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던 시절, 음주 후에 배달을 나갔다가 논두렁에 처박혀서 얻은 상처다. 닭 껍질 같은 목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막걸리 세 주전자를 비운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춤추는 오락기의 스텝을 밟듯 비틀거리던 남자는 전신주 밑에서 고꾸라진다. 아이는 정육점 문을 닫을 시간이라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여자에게 우족으로 얻어맞을 것이다. 다소 늙고 지쳐 보이는 친구는 전신주 밑에 돋아난 민들레 풀포기에 얼굴을 문대고 있다. 아이는 돌아서서 정육점 쪽으로 달려간다. 치맛자락이 후텁지근한 바람에 폴락폴락 날린다.

 

아이가 남자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남자는 그간 피부가 더 그을린 듯 했다. 아이는 트럭에 올라탄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귀찮은 듯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아이는 모기 물린 어깨를 긁으며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차를 바라본다.


여자는 새로 들어온 고기를 옮긴다. 돼지가 부위별로 해체되어 저장된다. 손에 들린 칼이 신체의 여느 부위처럼 능숙하게 다뤄진다. 골절기가 드릴과 같은 소리를 내며 뼈를 동강낸다. 폭염 때문에 고기는 더 이상 쇼 케이스에 진열되지 않고 냉동고에 보관된다. 아이는 ‘고기 안에 있음’ 이라고 붙여진 빈 쇼 케이스에 살갗을 댄다. 트럭이 지나간다.

 

남자는 입가로 술이 흥건히 배어나올 듯 취해 있었다. 대문에 제대로 열쇠를 꽂지 못하고 손이 연신 미끄러졌다. 아이는 열쇠를 낚아채어 문을 열어준다.

 

사무실에서는 음주운전이 발각된 그에게 더 이상 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남자는 사무실 건물 입구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볕이 온 몸의 땀구멍을 뜨겁게 팽창시켰다. 일자리를 잃는 것은 탯줄을 잡아 뜯기는 것과 같이 더러운 기분이었다.

아이는 집안으로 남자를 부축해 들어간다. 살림살이가 거의 없는 집안의 방바닥에 남자를 눕힌다. 좁은 공간에는 온통 빨랫감과 쓰레기뿐이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다. 아이는 냉장고를 열고 페트병에 남은 사이다를 꺼내 따라놓는다.

 

남자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이는 남자보다 자신이 더 어른이 된 듯 하다. 집안은 오래 묵은 가죽 누린내를 풍긴다. 집안 곳곳의 창문을 연다. 남의 집에 발을 들였을 때의 낯설음과 호기심이 물씬 풍긴다. 새로운 행성에 놀러간 어린왕자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이건 누구예요?”

 

아이가 서랍장 위에 놓인 액자를 가리키며 묻는다. 남자는 벽에 기대듯 눕는다. 아이는 문득 객쩍은 생각이 들어 손을 모아 쥐고는 걸음을 옮긴다. 그때, 뜨겁고 끈적거리는 것이 발목을 잡는다. 남자의 손아귀 힘은 복사뼈를 부술 듯 그러쥐다가 발목을 끌어당긴다. 아이는 짧은 비명과 함께 미끄러져 문지방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는다.

 

눈을 뜨자 누런 천장이 올려다 보인다. 남자의 머리칼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아이는 시멘트덩이에 눌린 듯 팔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남자는 어린 새의 날개 죽지를 잡아 뜯듯 아이의 가랑이를 잡아 벌린다. 벗겨진 티셔츠와 반바지가 방구석에 던져져 있다. 근원지를 모를 통증이 굵은 나무뿌리처럼 몸 구석구석으로 뻗쳐오른다. 남자의 땀방울이 배위로 떨어지자 아이는 그제야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상한 날고기냄새가 난다. 남자는 아이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방바닥에 머리를 내리친다. 아이의 시야가 고장 난 엘리베이터처럼 덜컹거린다. 뜨거운 납덩어리가 아랫도리를 쑤시고 들어와 배에 무겁게 들어찬다. 뜨거운 점액질의 허물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려 숨을 덮치듯 아이는 벅찬 호흡곤란을 느끼며 다시 기절한다.

 

트럭은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이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울지 않는다. 차창너머로 어두운 풍경이 연탄을 굴린 자국처럼 스쳐지나간다. 남자가 아이를 내려놓은 곳은 시골 들길이다. 차의 불빛이 사라지고나자 사방이 어둠이다.


무작정 걷던 아이는 목을 더듬는다. 남자의 손자국이 남은 목은 아직도 밧줄이 감겨있는 듯 뻐근하다.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본다. 가랑이 사이에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좁은 성기 틈으로 그가 빨려 들어간다. 손바닥만한 주머니 속에 압축되어 담기는 홈쇼핑의 방수점퍼처럼 마지막 새끼손가락 하나까지 감쪽같이 사라진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몸속의 통로 하나가 졸지에 가장 두려운 길로 바뀌었다. 아이는 어기적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어둠에 묻힌 몸이 주변 논의 두엄냄새에 물들어 점점 고약하게 문드러지는 듯 하다. 아이는 비명을 지른다.

 


여자가 아이를 찾아온 곳은 경기도 평택의 파출소였다. 아무리 다그쳐도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이틀을 내리 잤다. 여자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다 말고 허벅지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발견한다. 깨어난 아이에게 소족을 고아 먹인다. 아이는 숨넘어갈 듯 딸꾹질을 해대며 지난 일을 털어놓는다. 아이가 경기를 일으킨다. 여자는 아이를 들쳐 업고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향한다.

 

얼룩진 시트 위에 눕혀진 아이가 몸을 뒤튼다. 의사는 검버섯이 핀 손으로 검사기구가 놓여진 알루미늄 카트를 끌어당긴다. 순두부처럼 연한 아이의 질 벽이 수저로 긁어낸 듯 심하게 헐었다. 다리를 오므리려 안간힘쓰는 아이의 종아리 근육이 바짝 도드라진다. 거즈가 집힌 집게를 내려놓은 의사는 요즘 분만환자가 적어 수술실에 먼지가 쌓일 지경이라고 말한다.

 

거리로 나오자 끈끈이주걱의 턱에서 떨어지는 진액처럼 무거운 땀줄기가 여자의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골로 이어진다. 아이를 업은 여자는 진단서를 쥐고 경찰서로 향한다. 신고절차는 복잡했다. 아이에게 몇 개의 질문을 건넨 형사는 다시 찾아오라며 날짜를 정해준다. 아이는 말이 없어졌다. 경찰서에 들를 때나 배가 고플 때를 제외하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집과 가게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고기를 볶고 갈비찜을 했지만 밥을 반 공기 이상 비우지 못했다. 남자는 트럭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경찰서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이는 잠을 자다가 아랫도리가 아프다며 자주 깨어나 울곤 했다. 성기의 연한 살점을 끈끈이주걱에게 물린 듯한 질긴 통증과 함께 가위에 눌렸다. 도로변의 차가 지나는 소리라든가 누군가의 언성높인 목소리만 들어도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한번은 여자가 실수로 리모컨을 밟아 텔레비전 볼륨이 올라가자 아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아이는 살갗의 비늘들이 일제히 얼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여자의 몸속을 되짚어 더운 주머니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경찰서를 찾아갈 때마다 형사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성폭력을 전담한다는 여형사는 잠깐 얼굴을 내비치더니 더 이상 만나볼 수 없었다. 형사가 대하는 태도로만 봐서는 아이 쪽이 피해자인지 피의자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경찰서에 다녀온 밤에는 매번 열이 끓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때로는 죽은 살덩어리보다도 더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여자가 칼에 묻은 지방을 떼어낸다. 식당집 주인은 딸아이의 생일잔치 반찬으로 쓸 돈가스용 고기를 주문한다. 여자는 생고기를 연육기에 넣고 작동시킨다. 아이는 간이침대에 누워 있다. 식당집 주인이 그 모습을 흘끗 보더니 고기가 든 봉지를 들고 나간다.

 

“아 범인이 집엘 안 들어오는데 어떻게 잡습니까? 집엘 들어가야 가서 범인인지 아닌지 잡아다 확인을 할 거 아니에요. 안 그래? 기다려요, 좀. 우리도 놀고먹는 거 아니니까…”

 

형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여자는 버너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식용유를 부어 아이에게 줄 돈가스를 튀긴다. 아이는 마요네즈와 케첩을 바른 돈가스를 끝부분만 조금 허물어먹고는 잠이 든다.

 

가게 뒤편의 화장실로 향하던 여자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자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의 수평선이 깊다. 낮게 뜬 달은 만삭인 여인의 배처럼 부풀었다. 오줌버캐 낀 변기 주변으로 모기떼가 극성이다. 노끈에 매달린 화장실 열쇠가 쭈그려 앉은 여자의 허벅지에 닿는다.

 

사고를 당한 후로 아이는 오줌 누는 것을 어려워한다. 반드시 집에서만 용변을 본다. 변기 위에 앉아 발등을 비비며 괴로워하다가 한참 만에 간신히 쪼르륵, 고드름 녹는 소리를 내며 오줌줄기를 흘렸다.

 

여자가 가게에 들어섰을 때 막 문밖을 지나는 트럭이 눈에 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검은 옆통수를 얼핏 본 듯하다. 여자는 재빨리 수화기를 걸고 형사에게 전화를 건다. 갓 베어올린 돼지 간처럼 따뜻하고 비릿한 맛이 빈 입안을 훑고 지나간다. 여자는 서둘러 가게를 정리하고 아이를 들쳐 업는다.


그 뒤로 경찰서에서는 연락이 없다. 몇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담당형사는 매번 자리를 비웠다. 아이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여자는 두려움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두려움은 언제나 분노를 동반한다. 여자는 나뒹구는 비계조각들을 움켜쥐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저녁 공기가 습하다. 여자의 왼쪽 팔에 들린 시장바구니가 흔들거린다. 여자는 놀이터 옆 주택가로 들어선다. 놀이터 입구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트럭이 세워져 있다. 반쯤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자전거 한 대가 죽은 곤충처럼 대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있다. 반 지하로 이어지는 시멘트 계단은 좁고 깊다. 집안의 불빛이 현관 유리문 위로 번져 있다. 여자는 문을 두드린다. 한참 만에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타난다. 기미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는 다시금 자궁이 석고처럼 차갑게 굳는 것을 느낀다. 어스름 속에서 여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 미약한 경련이 인다. 그가 여자의 멱살을 움켜쥔다.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그가 문을 닫고 들어간 자리에서는 술 냄새가 풍긴다. 여자는 계단에 걸터앉는다.

 

남자가 다시 나온 것은 열 시가 다될 무렵이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두 발자국을 채 떼기 전에 몸속에 짧은 진공상태가 스쳐가는 것을 느낀다. 솟아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뒷걸음질친다. 여자가 그를 현관 안쪽으로 떼민다. 그의 배에 꽂았던 독일나이프를 빼낸다. 칼날은 그의 어깨와 심장을 차례로 파고든다. 흘러내린 피가 장판에 고인다. 그의 몸 사방에서 핏줄과 힘줄, 근육이 공 튀기는 소리를 내며 끊긴다. 가느다란 직선을 그리는 칼날은 굳게 닫힌 여자의 성기를 닮았다. 칼끝이 마지막으로 후비고 들어간 곳은 공포로 쪼그라든 그의 고환이다. 여자는 신발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늘러 붙은 피를 닦아낸다. 수돗물에 칼을 씻는다. 칼은 대수롭지 않게 핏자국을 벗는다.

 

장마는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빗줄기가 쏟아 붓듯 내리친다. 여자는 남편의 제사상 앞에 앉아 날이 밝는 것을 바라본다. 살다보면 삶의 어느 부분은 더러 식어버린 소머리고기처럼 퍽퍽하기 마련이었다.

 

집안이 눅눅하다. 여자는 보일러를 켠다. 한여름인데도 아이는 두터운 담요를 뒤집어쓴 채 땀 흘리며 잠들어 있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떨어진다. 차가운 가위가 아이의 이마를 스친다. 미용사는 귀밑으로 아이의 머리칼을 잡아당겨 양쪽 기장을 맞추어 본다. 아이는 미용 가운 밑에 손을 모은 채 방울달린 머리고무줄을 만지작거린다. 분무기를 분사하자 아득히 먼 대륙에서 내리는 비처럼 낯선 물 냄새가 훅 끼친다. 아이는 거울 너머로 짧아진 커트머리를 본다. 종이를 대고 자른 듯 가지런한 앞머리는 마치 이집트의 왕자 같다.

 

장마가 끝난 거리에는 더욱 지독한 폭염이 내려앉았다. 여자는 부지런히 날고기를 자르고 실내를 청소한다. 모기향이 몸을 허물며 타들어간다. 길가에 인적이 드물다. 긴 장마기간 동안 고기들은 숙성실 안에서 얼음 층을 쌓으며 더 단단해져간다. 여자는 빈 쇼 케이스 안의 인조잔디들을 전부 꺼내어 눈곱처럼 엉긴 기름때를 벗겨낸다.

 

아이는 어린왕자 책을 냄비받침 삼아 라면을 먹는다. 표지에 그려진 어린왕자의 금발과 긴 망토에 국물이 튄다. 여자가 냉동고에 들어간다. 아이는 라면가닥을 입에 문 채로 일어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뉴스에서는 피서객들이 한창 몰리는 해변이 비춰진다. 대낮의 볕이 기름때 앉은 가게의 유리문 위로 미끄러진다. 여자는 고깃덩어리를 들고 나와 육절기 안에 넣는다. 냉동고에서 뿜어져 나온 부연 냉기가 공중에 흩어진다. 아이는 냉동고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없다. 아직 냉기를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아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는 몸무게가 조금 늘었다. 매주 목요일 냉동차를 끌고 오는 배달원 사내가 무거운 고기를 옮겨주겠다는 호의도 거절한다. 냉동고를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여자뿐이다.

 

아이는 양은대야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가게 뒷문 문턱에 걸터앉아 냉수를 채운 대야에 발을 담근다. 덜 익은 석류알같은 새끼발가락이 움츠러든다. 쓰레기봉지 주변을 기웃거리던 개가 절뚝이며 다가온다. 어깨너머로 육절기 작동되는 소리가 종잇장 넘기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하늘에는 오래된 흉터처럼 희미한 달이 떠있다. 누군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무얼 드릴까요. 건조한 여자의 목소리가 묻는다. 아이는 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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