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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문학상 작품보기

제31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단검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1-05-23 18:43:51

 

단검

 

 

                                 이갑수(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 

 

 

아버지는 증권회사에 다녔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나를 마당으로 불러내 무술연습을 시켰다. 아버지는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있었고 나는 맨몸이었다.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빗자루를 휘둘렀다.

-다리에 너무 힘을 주지 마. 중심만 잡으면 돼.

아버지가 말했다. 빗자루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직선적인 움직임을 버려. 축을 잡고 좌우로 회전해.

빗자루가 몸을 찔러왔다.

-힘을 흘려보내, 받아넘겨, 막는 것보다 피하는 게 중요해.

-대체 이걸 왜 하는데요?

나는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대들었다.

-인생에는 뭐가 날아올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계속 빗자루를 휘둘렀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내가 단검을 던질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여덟 살 때까진 집에서 살림을 하다가, 학교에 들어가자 동대문에 옷가게를 차렸다. 어머니는 저녁때 나가서 아침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안 맞는다고 매일 싸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둘이 똑같아 보였다. 아버지가 비서와 바람을 피우자 어머니는 애인을 만들었고, 아버지가 카드로 술값을 긁고 오면 어머니는 같은 금액만큼 쇼핑을 했다.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야.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그것만 먹으면서 살 수는 없잖니?

이유를 묻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혼기념 선물로 5층짜리 상가 건물이 내 명의로 바뀌었다. 제대를 하고 한 달 뒤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재혼했다. 아버지는 2층 어머니는 1층이었다. 나는 신랑신부 입장은 2층에서 보고, 신부가 부케를 던지는 것은 1층에서 봤다. 사진은 할아버지 옆에서 찍었고, 밥은 외할머니와 먹었다. 결혼식에 같이 같던 여자 친구는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지친 것 같았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자 친구에게 나는 상가 건물 얘기를 했다.

-축하해.

여자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카페를 나왔다.

상가에서 나오는 월세만으로도 돈은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생활을 원했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졸업을 앞둔 학기에 학교 대강당에서 취업 박람회가 열렸다. 나는 성적이 우수했고, 다양한 종류의 컴퓨터 자격증도 있었고, 토익 점수도 높았다. 이름 있는 대기업에도 취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람회의 구석에 있는 ‘베스트 파이프라인’의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세상의 혈관을 만들어갈 인재를 찾습니다.’

회사 소개란에 그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안내 책자에 규칙적으로 배열된 파이프 사진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면접관이 장점을 물었을 때, 나는 성실함이라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모두 개근상을 받았고, 대학에 와서도 버스가 교통사고가 났던 한 번을 제외하면 결강한 적이 없었다. 연수기간에 내 성실함은 바로 인정받았다.

베스트 파이프라인은 그 이름처럼 파이프와 관련된 일을 하는 회사였다. 아파트와 주택에 수도관과 가스관이 지나가도록 설계와 시공을 했고, 공장의 공업용수 유입, 배출관을 만들기도 했다. 작년엔 리비아의 송유관 공사를 따내서 400%로 성장을 이뤄냈다. 나는 7년을 일했지만 실제로 파이프를 본 적은 없었다. 설계는 설계팀에서 했고, 공사를 따오는 것은 이사진이 했고, 공사는 시공 팀에서, 시공 후 관리는 관리팀에서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설계팀이 만든 설계도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입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설계도면으로 공사를 할 수는 있지만 고객들은 2차원으로 된 설계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3차원의 모형으로 보여줘야 했다. 일은 쉬웠다. 도면의 숫자들을 입력하고, 건물과 파이프의 선을 긋는 것이 다였다. 나머지는 2천만 원이 넘는다는 프로그램이 알아서 해줬다.

매일 새로운 도면이 왔고, 도면엔 항상 다른 숫자가 쓰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똑같은 건설회사에서 만든 똑같은 16층 아파트인데도 가스관과 수도관은 전혀 다르게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3년 전에 작업했던 공장의 영상을 새로 짓는 공장의 영상에 덧붙여본 적이 있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래야 우리가 돈을 벌지.

설계팀에 있는 입사 동기는 모든 건물의 파이프라인 설계가 다른 이유를 묻자 그렇게 대답했다.

 

 

2

 

 

직장 상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아내는 유치원 선생이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단정하게 다듬은 손톱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고 조신한 여자였다. 데이트를 할 때도 내가 가자는 데로 묵묵히 따라올 뿐 좋다, 싫다 말이 없었다. 취미도 자수와 뜨개질, 독서, 음악 감상 같은 것들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하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남자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향해 뭔가를 던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 한다. 아니 생각해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우리 저거 보러 가요.

어느 날, 아내가 벽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국 국립기예단의 공연이었다. 아내가 어디에 가자고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연극, 영화, 콘서트, 어떤 것에도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던 여자였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공연장은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생각보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모여앉아 있었다. 노인과 아이들이 많았다. 공연이 시작됐다. 줄타기, 인간 탑 쌓기, 대나무 곡예, 외발자전거, 공중그네 등이 이어졌다. 아내는 즐거워했지만 대체로 담담하게 무대를 바라봤다. 나는 어릴 때 동네에서 봤던 서커스를 떠올렸다.

공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 순서마다 나와서 소개를 하던 사회자가 모자를 벗고 땀을 닦았다. 그는 보기만 해도 더워 보이는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자 여러분 아쉽지만 이제 마지막 순서입니다. 눈을 가리고 빠르게 회전하는 과녁에 달린 풍선을 터트릴 겁니다. 과녁 앞에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동생을 죽이게 되는 누나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루쉰, 루시앙 남매를 소개합니다.

사회자가 말했다. 열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소녀가 무대 위로 올라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두두둥드두둥 드럼 소리를 시작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흘렀다. 소년이 원판 앞에 섰다. 스텝 몇 명이 나와서 소년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쇠사슬의 길이는 30cm정도 밖에 안됐다. 소년은 한걸음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소녀는 눈을 가렸다. 원판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러 색깔의 풍선들이 혼합되어 무지개처럼 보였다. 소녀가 단검을 던졌다. 소년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나는 꼴깍 침을 삼켰다. 퍼엉,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달려 나갈 기세였다.

소녀가 두 번째 단검을 던졌다. 소년이 몸을 틀었다. 퍼엉 소리가 두 번 연속해서 들렸다. 한 번에 두 개의 단검을 던진 모양이었다. 소녀는 단검의 개수를 늘려갔다. 아내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무대 위로 올라갈 것 같아 어깨를 감쌌다. 소녀가 양손으로 동시에 열 개의 단검을 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났다.

원판 앞에 묶여 있던 소년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와 허리를 숙였다. 회전을 멈춘 원판에는 빼곡히 단검이 박혀 있었고, 터진 풍선의 잔해들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서름했다. 아내는 기립박수를 쳤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공연 사회자를 고소하고 싶다. 그는 단검 던지기 공연을 소개하면서 주의를 줬어야 했다.

 

절대 따라 하지 마시오. 라고.

 

 

3

 

 

결혼식 전부터 아내는 불안해했다. 내가 약속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짜증을 냈다. 혼수를 고를 땐 점원과 싸우기도 했다.

-나 사랑해?

아내는 자주 그렇게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당연하지"하고 대답했지만, 아내는 그 말을 못미더워 했다. 아내의 불안이 내게까지 옮았는지 나도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결혼식 전의 신부는 예민해.

고민을 들은 친구들은 그렇게 말했다. 결혼을 앞두고 생리주기가 변하는 여자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내는 결혼식 당일에도 뭔가 불만인 것 같았다.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렸고 예식장 조명까지 트집 잡았다.

-내가 지금껏 본 신부 중에 제일 예뻐.

나는 식장 앞과 신부대기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아내를 달랬다. 결혼식이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자기 부부가 혼주 석에 앉겠다고 싸웠다. 하객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결국 새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양보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혼주 석에 앉았다. 아내의 하객보다 내 하객이 훨씬 많았다.

다행히 아내는 식이 시작되자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다. 주례사의 말을 듣는 아내는 평소처럼 수줍은 숙녀였다. 그런데 주례사가 끝나고 남자가 반지를 끼워 줄 때 아내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건 내 잘못도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고른 반지를, 다이아의 캐럿이 조금 작은 것으로 몰래 바꿨다. D․H 로렌스의 말마따나 그것은 그냥 탄소일 뿐이었다. 단지 반짝거린다는 이유로 탄소덩어리가 천만 원이 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인 서약이 끝나고 키스를 할 때, 아내는 내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아팠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신랑 좀 웃으세요.

사진사가 말했다. 하지만 입술이 아려 평소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기념촬영이 끝나고 부케를 던질 차례가 됐다. 아내는 앞으로 나가면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박수를 치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부케를 받기로 되어 있던 건 아내의 학교 후배였다.

-하나, 둘, 셋.

사진사가 구호를 외쳤다. 아내는 힘껏 부케를 던졌다. 방향이 문제였다. 부케는 뒤가 아닌 옆으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그것을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랑이 부케를 잡으면 무슨 말을 들을지 우려가 됐다. 나는 몸을 숙여 부케를 피했다. 사람들이 웃었다. 아버지는 유난히 크게 웃었다. 아버지가 웃은 것은 내 동작 때문이었다.

두 번째 시도에서 아내는 예정대로 후배에게 부케를 던졌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나는 부케에서 한기 같은 것을 느꼈다.

-아들 딸 가리지 말고 낳아서, 우리처럼 잘살아라.

아버지가 대추를 던지면서 그렇게 말했다. 두 번째 폐백에서 어머니도 같은 말을 했다.

-아이는 천천히 생각하자.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4

 

 

신혼여행은 ‘그리하라’라는 섬으로 갔다. 태평양에 있는 섬이었다. 연초록빛의 바다와 산호, 화산폭발의 흔적이 관광명소라고 했다. 신혼여행 장소를 고른 것은 아내였다.

-더워.

비행기에서 내린 내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볕이 너무 뜨거웠다. 여행사 직원이 늦는 바람에 나와 아내는 공항 앞에서 삼십 분이나 서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신혼여행 기간 동안 피우지 않기로 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건 왜 가져왔어요?

아내가 물었다.

-아 습관이 돼서. 덥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껐다.

호텔에 들어가서 나는 바로 샤워를 했다. 땀 때문에 속옷까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린 것은 오랜만 이었다. 전날의 결혼식과 피로연에서의 누적된 피곤과 장시간 비행의 여독까지 겹쳐서 나는 아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저녁이었다.

-밤바다가 예뻐요.

식당으로 내려가진 전, 창밖을 보면서 아내가 말했다. 내 눈에는 온통 시커멓기만 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텔식당은 종업원이 외국인이라는 것만 빼면 한국의 호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연어스테이크를 시켰다. 퍽퍽했다. 아내가 와인을 주문했다.

-식사 후에 백사장에 산책하러 가요.

아내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는 산책을 하러 가지 않았다. 계산을 하면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창은 잡지사에서 일 하는데, 취재를 왔다고 했다. 나는 동창과 함께 식당 밑의 바로 내려가 고등학교 때 추억을 이야기 하면서 술을 마셨다. 조금 취했다.

-제수씨가 미인이다.

동창은 그렇게 말했다. 아내는 새치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바 구석에서 벌어진 다트게임을 구경하러 갔다. 내가 찾으러 갔을 때는 게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아내의 상대는 키가 190cm쯤 되는 외국인이었다. 손이 커서 다트가 장난감처럼 보였다. 나는 다트게임의 규칙을 전혀 몰랐다. 아내와 외국인이 세 번씩 번갈아서 던지고 있었다. 아내가 던질 때마다 환호성이 나왔다.

-다트는 82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싱글과 더블이 있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워. 제수씨가 잘하는 건가?

동창이 가이드북을 뒤지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아내의 취미에 다트는 없었다. 다트를 던지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 한쪽에 서름한 느낌이 들었다. 경기는 아내의 승리로 끝났다. 아내의 상대였던 외국인은 패배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 손 바닥을 위로 올리면서 혀를 내밀었다.

-야, 저 사람이 유럽 다트 챔피언이래.

동창이 말했다.

-설마.

내가 말했다. 아내가 나를 발견하고 옆으로 왔다.

-봤어요? 오늘 처음 해 봤는데. 내가 이겼어요.

아내는 내가 청혼했을 때 보다 더 기쁜 표정이었다. 계속 다트 던지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일부러 져준 거야. 그렇게 기분 좋게 만들어서 돈 더 쓰게 만드는 거라구.

내가 말했다.

그 후의 신혼여행은 일정대로 화산 폭발의 잔해와, 산호, 수족관 따위를 보면서 보냈다. 당연히 첫날밤도 있었지만, 지나친 사생활은 접어두자.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내는 내게 고무장갑을 던졌다. 나는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밀린 업무를 벌충하느라 분주했고 아내는 살림을 장만하고 집을 꾸미는데 여념이 없었다. 퇴근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집은 매일 조금씩 신혼집다워지고 있었다. 오로지 사각이던 창문에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 드리워지고 죽은 나뭇결이 차갑던 식탁에 식탁보가 깔렸다. 베란다 앞에는 화분이 놓였다. 살림도 늘어났다. 프라이팬과 냄비가 바뀌고 녹즙기가 생겼다. 녹즙기를 사온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야채즙을 마시고 출근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 거울부터 책상 위의 재떨이까지 모든 것이 잘 벼린 진검처럼 반짝였다.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하길 잘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날도 아내는 새로 사온 그릇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릇을 고르느라 백화점을 세 바퀴나 돌았다고 했다.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릇이야 다 똑같지 뭐. 요리학원 등록했어?

나는 넥타이를 풀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내가 접시를 떨어뜨렸다. 나는 깨진 접시를 치워줄 생각으로 개수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붉은 손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나는 고개를 외로 틀어 피했다.

-당신이 치워줘요.

아내가 말했다. 나는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손가락에 피가 맺힌 것을 보고 그만뒀다.

 

 

5

 

 

-집에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봐.

결혼 일주년 때, 나는 아내에게 상품권을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꽃꽂이나 요리강좌 같은 것을 염두하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산 것은 국립기예단의 소녀가 던지던 단검 세트였다.

일주일 후, 퇴근했을 때 뭔가 쉬이익 소리와 함께 낮은 호를 그리며 날아왔다. 순간적인 꿈이거나 환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릿한 통증과 함께 귓불에서 피가 뚝 떨어졌다. 벽에 튕겨 바닥에 떨어진 것은 검지 손가락만한 단검이었다. 그것과 똑같은 것을 아내가 내게 던지기 위해 그러쥐고 있었다. 두 번째 단검은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왼발을 축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단검을 피했다. 쉬익, 휘익 세 번째 네 번째 단검도 가볍게 피했다. 첫 번째 단검을 피하지 못한 것은 아내가 자신에게 단검을 던졌다는 사실에 놀라서였을 뿐 날아오는 단검 자체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내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만해.

내가 소리쳤다. 아내는 단검을 내려놨다. 손목이 아픈지 주먹을 쥐고 손목을 돌렸다. 그 후로 한동안 아내는 아무것도 던지지 않았다.

 

 

6

 

 

나는 과장으로 승진했고 아내는 임신을 했다. 입덧이 심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다시 단검을 던졌다. 출근할 때마다 구두를 신으면서 한두 개의 단검을 피해야 했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던지는 경우도 있었고 새벽에 자는데 깨워서 단검을 던지기도 했다. 피곤하고 귀찮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가지면 예민해지는 법이니까. 단검은 처음보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진 않았다.

하지만 출산 후에도 아내의 단검 던지기는 계속 됐다. 아내는 딸애를 안은 채로 단검을 던졌다. 젖을 먹이다가 기저귀를 갈다가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던지곤 했다. 아내의 실력이 늘어 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시로 날아오는 단검 탓에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화가 났지만 딸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내를 쏙 빼닮은 딸애는 이상하게도 내가 단검을 피하는 것을 볼 때마다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딸애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아내가 단검을 던지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이사를 가야겠어요.

딸애가 다섯 살이 됐을 때 아내가 말했다. 딸애가 놀기에 집이 너무 좁다는 게 이유였다. 왠지 마음껏 단검을 던지기에 너무 좁다는 의미로 들려 불안했지만 내집 마련에 대한 생각은 갖고 있었으므로 큰 맥락에서는 동의했다. 하지만 시기는 좀 이르다고 생각했다. 1,2년쯤 더 기다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양손 가득 단검을 들고 있어서 그만뒀다.

집을 구하는 일은 일주일이 넘도록 진전이 없었다. 아내는 집을 보러 다니는 내내 신경질적으로 단검을 던졌다. 한번은 운전 중에 던지는 통에 크게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다. 결국 아내의 뜻대로 회사에서 멀지만 평수가 큰 집을 샀다. 덕분에 나는 두 시간씩 걸려 출퇴근해야 했다.

이삿짐을 풀자마자 아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새 단검세트를 장만한 것이었다. 검은 천안에 스물여덟 자루의 크고 작은 단검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단검을 갖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가 단검을 어디에 숨겨두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닌자의 수리검처럼 허리나 가슴께에 있거나 마술사의 카드처럼 팔소매에 있진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업무가 많았다. 신입사원이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려 부서 전체가 난리를 피워야 했다. 겨우 일을 수습하고 회식을 하느라 평소보다 퇴근이 늦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잠든 딸애를 안고 TV를 보고 있었다. 홈쇼핑 방송이었다.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 김장하는 모습과 최신식 김치 냉장고가 번갈아 화면에 나왔다. 아내는 내가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휘익, 탁, 익숙한 소리가 났다. 나는 두 번째 단검을 피하지 않고 들고 있던 가방으로 받아쳤다. 튕겨져 나간 단검은 공교롭게도 아내를 향해 날아갔다. 빙그르 돌아 아내의 팔에 맞았다. 다행히도 손잡이 부분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내는 서럽게 말했다. 눈물이 그렁 맺히더니 쏟아져 내렸다. 미안한 마음에 아내를 달랬다. 하지만 아내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고 자고 있던 딸애까지 일어나 같이 울어댔다.

밤새, 흑흑, 엉엉 소리가 방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부엌에서 소주를 마셨다. 두 여자의 울음소리가 술을 더 쓰게 만들었다. 한심하기도 하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회의도 들었다.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는 잘 몰랐겠지만 네 엄마도 가끔씩 바늘로 날 찔렀단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하소연을 들은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가르친 것들을 잊지 마라. 건투를 비마.

아버지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라는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아내는 계속 단검을 던졌다. 나는 성실하게 피했다.

놀랍게도, 아니 솔직히 말하면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딸애가 아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딸애는 고무찰흙으로 단검을 만들어서 던졌다. 조악한 찰흙단검은 내게 다다르지 못하고 발 앞에 떨어졌다. 그러면 딸애는 조르르 달려와 찰흙단검을 집어서 몇 발짝 앞으로 와서 다시 던졌다. 그 모습이 너무 앙증맞아 남자는 맞는 척을 해줬다.

휙, 휙, 휙, 시간은 날아가는 단검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7

 

나는 부장이 되었고 딸애는 교복을 입었다. 아내는 아파트 청약에 성공했다. 다행히도 아내는 전처럼 자주 단검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한번 던지면 매우 위협적이고 묵직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던진 단검은 벽을 맞고 튕겨 나오지 않았다. 벽에 박혔다. 벽에 박힌 단검은 남자가 양손으로 잡고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시부저기 단검을 뽑아 도로 품속에 넣었다. 아내보다 딸애가 더 자주 날 공격했다. 딸애의 단검은 아내처럼 빠르고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한 번에 여러 개를 던지는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기만 하면 던지는 통에 곤욕스러웠다. 던지는 방법도 아내와는 달라 피하기도 쉽지 않았다. 직선으로 날아오는 아내의 것과는 달리, 딸애의 단검은 유영하듯 회전하면서 다양한 궤도로 날아왔다. 공격부위도 달랐다. 아내는 정확히 급소를 노렸다. 정수리부터 배꼽을 잇는 몸의 정준선과 심장, 폐 등의 주요 장기를 향해 던졌다. 반면 딸애는 손목이나 발목, 관절 쪽을 노렸다.

두 모녀가 함께 단검을 던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정말 죽을 맛이었다.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고 허리가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번은 아내가 던진 단검이 남자의 심장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딸애가 다리로 던진 단검을 피하느라 점프했을 때, 바로 아내가 이어서 던지는 바람에 완벽히 피하지 못해 칼끝이 닿은 거였다. 와이셔츠 앞주머니의 단추가 툭 떨어졌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날 죽일 셈이야?

나는 역정을 냈다.

-단추 다시 달아줄게요.

아내가 말했다.

-역시 아빤 대단해.

딸애가 아내를 거들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두 여자의 애교 탓도 있었지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힘이란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아버지가 알려준 거였다.

-힘들어도 웃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어도 여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힘이 다했다는 걸 들키면 공격이 더 거세진다.

나는 아버지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원판 앞에 묶여 있던 그 소년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있어도 많은 것처럼, 없어도 있는 척해야 한다. 틈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날카로운 단검에 찔리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영원이라고 믿는 것도 실은 무한의 지속일 뿐 한계가 있다. 내의 포용력, 인내의 소실점도 끝이 왔다. 너무 힘들었다. 퇴근 후에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하루는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신문을 읽고 있는데, 딸애가 단검을 던졌다.

-제발 그만 좀 해. 난 슈퍼맨이 아니라구.

참다못한 나는 딸애한테 소리를 질렀다. 그즈음 딸애는 지나칠 정도로 자주 단검을 던졌다. 딸애가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내 딸이 아내 같은 여자가 되는 게 싫었다.

-저 주워왔어요? 친딸 아니에요? 엄마 아니야?

딸애는 도리어 울먹이면서 반발했다.

-맞아. 무슨 벼락 맞을 소릴.

아내가 부엌에서 나왔다.

-너무해요. 아빠.

딸애는 바닥에 옹송그리고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니 그게 던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너무 조금만 자제해 달라는 거야. 아빠도 요즘 힘들단다.

딸애는 계속 울었다.

-한 번도 맞아주지도 않으면서.

딸애가 중얼거렸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무리한 요구였다. 잠시 무르춤하게 서 있던 내게 아내가 단검을 던졌다. 보이진 않았지만 소리로 알 수 있었다. 휙,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을 듣고 몸을 돌려 그것을 피했다. 순식간에 두 자루가 더 날아왔다. 이번에 허리를 숙여 피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참아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참아도 딸애의 단검 던지기는 멈추지 않았다. 허리와 무릎이 아파 한의원에 다녔다.

-퇴행성관절염입니다. 무리한 운동은 삼가시는 게 좋습니다.

한의사가 말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멈춘다고 정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의원을 나오면서 나는 고등학교 때 과학 선생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이 컵이 움직이고 있나요, 멈춰 있나요?

아무렇게나 묶은 파마머리와 통통한 볼이 묘하게 잘 어울리던 그 여선생은, 어느 날 교탁 위에 물 컵을 올려놓고 그렇게 물었다. 아이들은 멈춰 있다고 대답했다.

-틀렸어요.

여선생이 말했다.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고 태양계와 은하가 회전하고 있으니 컵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내 뒤에 거대한 원판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8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전 병원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야 돼요?

-끝까지.

아버지는 힘겹게 대답했다.

-결국은 못 피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나는 다시 물었다.

아버지 대신 심전도 측정기가 삐-이- 하고 대답했다.

49재가 끝난 후부터 나는 점점 무력감에 빠졌다. 쉬고 싶었다. 내가 쉬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하고 호봉만 쌓여갔다. 사무실 전체를 볼 수 있어 자리 잡은 창가 앞 책상이 왠지 구석자리처럼 느껴졌다. 결재 서류들에 하는 서명들도 점점 희미해져서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허릅숭이 부장이었다.

외식을 핑계로 아내와 딸을 고기 집으로 불러냈다. 딸애가 좋아하는 살칫살과 아내가 좋아하는 등심을 시켰다.

-퇴직 해야겠어, 바닷가 마을에서 낚시도 하고 텃밭이나 일구면서 살고 싶어.

식사 후에 내가 말했다. 예상대로 아내와 딸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젠 나도 지쳤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진심이 통했는지 아내와 딸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난 독립할래요.

현관문을 열면서 딸애가 말했다. 계속 쫓아다니는 선배가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다는 것이었다.

-제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남자인 것 같아요. 한 달만 기다려 주세요.

딸애의 말투가 간곡했고 이것저것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 했으므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일주일 후에 딸애는 사윗감이라며 키가 헌칠한 청년을 집에 데려왔다. 턱 선이 진하고 입술이 두꺼워 다부져 보였지만 눈매에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아내를 대하는 것도 그렇고 몇 마디 말을 나눠보니 넉살이 좋고 사글사글했다. 무역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조심하게 희재는 칼 솜씨가 좋으니까.

술을 마시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바지가 작아져서 걱정입니다. 어머님을 닮아서 그런지 요리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청년이 말했다.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지는 말게나. 움직임이 둔해지거든, 표적도 커지고.

아내와 딸이 동시에 나를 째려봤다. 청년이 안됐다는 생각에 계속 술을 권했다.

결혼 준비는 빠르게 진척됐다. 아내는 청첩장을 500장 찍어서, 친지들과 직장동료들을 향해 날렸다. 딸애가 왜 한 달을 기다려 달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잘 피하게.

폐백을 마치고 내가 말했다. 딸애가 칼날 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신혼여행은 그리하라 라는 섬으로 간다고 했다. 쉬이익, 비행기가 단검 날아가는 소리를 내며 이륙했다. 웬일로 조용하던 아내는 공항 면세점 앞에서 기어이 단검을 던졌다. 나는 가능한 조용히 피했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프랑스인, 영국인, 일본인, 중국인, 콩고인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고국에 돌아가 단검을 던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곧,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내남없이 무언가 피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것이 석궁이든, 다트든, 총알이건 간에. 면세점 점원의 도움으로 겨우 아내를 진정시켰다. 이러는 것도 이젠 마지막 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허로웠다.

일을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예정보다 몇 달 늦게 사표를 냈다. 인사치레로 몇 번씩 만류했지만 다들 반기는 것 같았다. 직원들이 환송회를 열었다. 기분이 좋아 마시고 또 마셨다.

-내가 말이야. 달인이야 달인. 얼마나 잘 피하는지 자네들은 상상도 못할걸.

4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어스레하게 동이 틀 무렵에야 끝났다. 나는 만취했다. 다리가 허청거렸고 몸은 계속 벽을 향해 비칠댔다. 집으로 오기까지의 기억이 단검 날 뒷면의 톱니처럼 듬성듬성 뜯겨 나갔다. 아내가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나는 멋대로 감동했다. 눈물이 났다. 그 바람에 사위가 흐려져 아내가 단검을 꺼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단검은 소리 없이 날아왔다. 느렸다. 아니 너무 빠르기 때문에 느리게 보였다.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상체만 조금 빗서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푸욱, 단검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압력에 밀려 뒤로 고꾸라졌다.

-당신도 이제 늙었네. 이 정도도 못 피하고. 우리 헤어져요.

쓰러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아내가 말했다. 억울했다. 취해 있었고 너무 갑자기, 의식의 바깥에서 날아온 단검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슴에 꽂힌 단검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앎둑해졌다. 나는 까무룩 잦아드는 정신을 붙잡으며 아내를 보기 위해 애썼다. 아내는 환하게 웃고는, 나를 버려두고 나갔다.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원판이 쓰러지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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