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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문학상 작품보기

제33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스푸트니크 126호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3-05-21 23:52:02

 

 

●제33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스푸트니크 126호

 


김홍진(서울시립대학교·국문학·3)

 

 

 

  없다. 창고에는 아무도 없다.
  문의 양 옆쪽부터 ㄷ자로 이어진 철제 진열대 안에는 재고품들이 가득하다. 햇빛 몇 가닥만이 박스 틈을 비집고 창고 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길게 늘어선 진열대를 따라 걸으며 물건을 훑어본다. 찾아야할 물건은 모두 여섯 개로 오전 정산에 누락된 제품들이다. 그래픽카드 두 장과 램 카드 세 장, 그리고 CPU 한 개를 진열대에서 빼낸다. 한 손에는 주문장을 든 탓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맨 위에 올린 CPU 박스가 흔들린다. 주문서를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 진열대에서 USB 메모리를 집어 드는 순간 품에 안겨있던 박스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USB 메모리를 얼른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당장이라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올 것만 같다. 내 시선은 문고리에서, 두 발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종아리가 떨린다. 목장갑을 벗어 둘둘 만 다음 USB 메모리가 든 쪽의 주머니에 넣는다. 누군가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를 보며 뭐냐고 묻거든 장갑을 꺼내 보여주면 될 것이다.
  박스들을 다시 챙겨들고 매장으로 나가자 A/S기사인 승재가 나를 불러 세운다. 나를 보자마자 매장 구석의 간이 테이블에서 김치찌개를 먹다말고 제 허벅지를 쓸어내리며 일어난다. 부탁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다. 승재는 점퍼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은박지 덩어리 꺼내 내게 건넨다.
  “2기가짜리 램 카드야. 벌크로 나온 거고. 아까 거래처 배달 갔다가 받은 건데 나는 딱히 쓸 데가 없어서…….”
  승재가 쭈뼛거리며 출장 한 번만 대신 나가달라고 말한다. 나는 인터넷 주문 담당 부서에 있어 매장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지만 일손이 달릴 때면 가끔 배달이나 A/S를 대신 나가고는 했다. 우리부서의 직원들은 재고 정리와 주문 정산과 제품 포장이 주 업무라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컴퓨터와 전자공학에 대해서라면 사장보다도 자신이 있다. 비록 2년 다니고 제적당했지만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귀동냥이 아닌 정식으로 배운 전공자였다.
  오늘은 주문량이 많아 내 일도 바빴지만 승재가 준 벌크 램 카드가 마음에 들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오토바이 열쇠를 건네받고 패딩을 챙겨 입는다. 테이블 맞은편의 벽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오후 뉴스가 방송되고 있다. 화면 속에서는 중년의 백인 남자가 연단에 서서 러시아말로 무어라 말을 한다. 백인 남자는 주먹을 지켜들며 안 그래도 튀어나온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격정적으로 연설을 이어나간다. 화면이 넘어가며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과 크렘린이 자료화면으로 나오며 뉴스 앵커의 설명이 뒤따라 붙는다.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행보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푸틴 총리가 지난달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한데 이어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순방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푸틴의 이 같은 행보에 옛 소련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철거민 시위가…….”
  소련이라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내가 여섯 살 때에 망해버린 나라였다. 아마 크리스마스 즈음으로 기억한다. 이마에 러시아 땅만큼이나 커다란 검버섯이 나있는 백인 노인이 연설하는 장면이 하루 종일 방송됐다. 늘 해주던 만화가 방송되지 않아 짜증이 났다. 저게 뭐냐고 묻자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소련이 망했대.”

  창고에서 가져온 상자들을 포장실에 옮겨놓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목적지는 용산 세무서 쪽의 PC방이다. 컴퓨터 몇 대가 맛이 간 모양이다. 얼른 끝내서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출발했는데 용산역 앞으로 넘어가는 지하차도부터 늘어선 차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다. 아직 네 시다. 퇴근길 정체라고 하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아마 근처에서 접촉사고라도 난 듯하다. 신호등이 몇 번 점멸하고 나서야 간신히 지하차도를 빠져나왔지만 바깥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용산역에서 한강로로 나가는 삼거리에 닿자 정체의 원인과 마주하게 된다.  용산역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 앞에 전경버스 두 대가 인도 쪽의 차로 하나를 막아서고 있다. 상인들이 시위라도 하는지 연탄재 색깔의 5층 건물의 외벽에는 붉은 현수막이 휘장처럼 감겨있다. 언뜻 보면 영정사진에 걸린 검은 리본 같기도 하다.
  오토바이 액셀를 당겨 그곳을 벗어난다. 세무서 뒷골목의 가로등이 켜지며 바닥에 주홍빛 원을 그린다. PC방으로만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천장이 키보다 낮아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고장’이라고 적힌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컴퓨터들은 전원 버튼을 눌러도 모니터에 화면이 뜨지 않는다. 나사를 풀어 뚜껑을 열어보니 CPU 팬 사이에 먼지가 한 움큼씩 끼어있다. 먼지를 털어내고 쿨러에 구리스를 치니 컴퓨터들은 다시 작동된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CPU 청소를 당부하고 PC방을 나온다.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한강로는 여전히 꽉 막혀있다. 핸들을 틀어 용산역 앞 사창가 골목으로 들어선다. 겨울의 사창가는 다른 계절보다 빨리 분홍빛 형광등을 켠다. 300미터 남짓 되는 골목길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핸들을 당겨 속력을 낸다. 오토바이 엔진이 숨이 벅찬 듯이 앵앵거릴수록 더 세게 핸들을 당긴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마치 분홍빛 형광등이 양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점점 가속이 붙어 골목 중간을 넘어설 즈음이면 마치 빗발치는 예광탄 속에 있는 것 같다. 골목길의 다른 끝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 만 발의 예광탄. 나는 홀린 듯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만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도시 어딘가에 또 있을까.
  예광탄을 처음 본 것은 2년 전 이맘때다. 2학년이 끝나고 제적을 당하자 곧바로 영장이 날아왔다. 1년에 한 번 3개월 동안 GP에 들어가는 것만 빼면 다른 부대와 다를 게 없는 생활이었다. 기관총의 총구가 향해 있는 북쪽으로는 숲 사이로 북한군 초소와 선전용 마을이 보였다. 북한군 초소와 GP 사이에는 강이 흘렀다. 신병 휴가를 열흘 앞둔 날의 새벽이었다. GP 옆 산의 관측초소에서 선임병과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관측초소의 전화가 울렸다. GP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위쪽 GP에서 연락이 왔는데, 시체 하나 떠내려간다더라. 지금 바로 최 상병이랑 내려가서 시체 따라가면서 위치 보고해.”
  처음에 나는 GP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웬 시체이며, 시체를 따라가라는 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최 상병과 나는 야시경으로 강을 살펴보며 떠내려 올 시체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지나자 시체 한 구가 떠내려 왔다. 몸의 크기로 보아서는 남자의 시체 같았다. 최 상병과 나는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시체를 따라갔다. 오전 열 시쯤 되자 부GP장이 합류했다. 왜 강으로 들어가 시체를 건져내지 않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부GP장에게 물었다.
  “강 하구까지는 중립지역이라 못 들어가 인마. 우리 쪽으로 넘어 올 때까지 쫒아간다. 그리고 너는 현재 좌표나 잘 보고해. 발목 날아가기 싫으면.”
  부GP장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지도와 나침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나 지뢰 지대나 북한군 지역으로 들어갈까 봐 몇 번이고 좌표를 다시 확인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지뢰밭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한참을 걸어가던 중 부GP장이 멈추어 섰다. 어딘가에 걸렸는지 시체는 강 한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최 상병은 부GP장의 배려로 나무에 기대어 쪽잠을 청했다. 꿈속의 나는 낙오되어 혼자 남겨져 있었다. 주위에는 지뢰지대를 알리는 표식과 철조망이 얽혀져 주위를 둘러쌌다. 내 손에 쥐어진 지도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위에 좌표선만 그어져 있는 백색의 지도였다. 
  시체가 하구 강변에 닿았을 때는 초저녁이었다. 바위에 걸린 시체를 최 상병과 함께 끄집어냈다. 남자인 줄 알았던 시체는 여자였다. 물에 불어 커져보였던 것이다. 여자의 살은 물을 잔뜩 먹어 곤약처럼 반질거렸다. 입으로 감겨들어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보였다. 눈두덩이 밑이 퉁퉁 불어있었다. 건져낼 때 시체의 어깻죽지를 잡았는데 물 먹은 피부의 껍데기가 밀려나와 손톱 아래에 끼었다.
  한 시간쯤 뒤에 국군병원에서 앰뷸런스가 왔다. 군의관과 의무병은 시체를 보관용 팩에 넣어 앰뷸런스에 싣고 자리를 떠났다. GP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뒷산 너머에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예광탄이었다. 수 만 발의 예광탄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나갔다. 예광탄은 구정물을 거꾸로 헤엄쳐 올라가는 금붕어 떼처럼 금빛 꼬리를 그리며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목길 끝에 다다를 즈음 브레이크를 잡아 속도를 늦춘다. 한 여자가 사내에게 맞고 있다. 속도를 더욱 천천히 낮추며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126호 여자다. 사창가 골목의 업소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는데 그녀는 126호의 여자다. 그녀는 늘 유리벽 너머의 높은 홈바 의자에 앉아 아스팔트 바닥만 바라봤다.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는 가끔 그녀를 바라보고는 한다. 그녀의 진한 화장 뒤로는 나보다 두세 살은 더 어린 앳된 얼굴이 보인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개처럼 얻어맞고 있다. 사내의 손등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칠 때마다 삐져나온 브래지어 끈이 너풀거린다. 골목의 여자들이 하나둘 씩 나와 구경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몸은 각자의 업소에만 머물 뿐 거리로 나와 사내를 말리지는 않는다. 그녀 또한 도움을 청하지 않고 사내의 손찌검을 말없이 몸으로 받아낸다. 다시 오토바이 챙을 내리고 그녀를 지나쳐간다.
  오후에 승재가 준 램 카드를 빨리 써보고 싶은 마음에 퇴근을 서두른다. 오토바이 열쇠와 직원 유니폼을 반납하고 매장을 나서는데 사장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중얼거린다.
  “재고 갉아먹는 쥐가 있나, 왜 꼭 하나씩 재고가 안 맞아?”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가두지 않았으면 사장을 쳐다볼 뻔했다. 수 십, 수 백 개의 부품인데 하나쯤 안 맞는 정도야 그냥 지나칠 터다.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매장을 빠져나온다.
  나의 집은 용산역 바로 뒷동네인 도화동이다. 삼각지역을 지나 용마루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동네다. 강변에 창살처럼 솟아있는 아파트 단지 뒤편, 다세대 주택이 100여 채 정도 남은 빌라촌이다. 정체는 아까보다도 심해져서 버스가 삼각지역으로 나가는 데만 20분이 걸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켜 중고거래 카페에 접속한다. 점퍼 호주머니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미개봉 정품] LG 8GB USB 메모리★ 미개봉 상태 · 품질 보장 · 가격절충 안됨’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글과 함께 올리고 내 다른 물건들이 팔렸는지 확인한다. 일주일 전 창고에서 빼온 외장하드는 고가인 탓인지 아직도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사운드 카드에는 사람들이 여럿 달라붙었다. 올린 가격에 바로 사겠다는 사람에게 쪽지를 보내고 창을 닫는다.
  집을 나와 지하실로 내려간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천장에 매달린 줄을 손대중으로 찾아 잡아당긴다. 지하실 한 가운데 달린 백열등의 누런빛이 구석구석 젖어든다. 원래는 빌라 공용으로 쓰는 창고였지만 지금은 내 개인 작업실이나 다름없다. 창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빗자루와 박스, 이사 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텔레비전 따위를 정리해 한쪽으로 몰아넣고, 인터넷에서 합판으로 된 책상을 구입해 갖다놓으니 나름대로 근사한 작업실이 되었다. 행여나 누가 볼까 쪽창도 모두 신문지로 막았다.
  책상 위에 놓인 위성의 전지판은 번데기에서 이제 막 고치를 열고 나오는 나비의 날개처럼 반으로 접혀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지판은 백열등의 불빛을 반사시키는 각도를 달리한다. 식기세척기만한 크기의 위성 본체는 뚜껑이 열린 채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용산에서는 위성도 띄울 수 있다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실행에 옮긴이가 아무도 없을 뿐이다. 이 위성을 만들기 위해 용산을 떠도는 벌크 부품들을 긁어모았다. 벌크 부품에는 회사의 로고가 각인되어 있지만, 각 부품의 고유번호인 시리얼 넘버는 없다. 어느 공장에서 언제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품과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부품의 겉모습, 성능 모두 정품과 똑같다. 하지만 제조사는 벌크 부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A/S는 물론 안 되며, 간혹 수리기사가 벌크 사용자를 절도범으로 의심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만든 회사 스스로가 부정하는, 일종의 사생아인 셈이다. 이 위성은 벌크 부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추락한다고 해도, 절대 추적이 불가능하다.
  내 위성의 구조는 단순하다. 전지판은 수십만 원을 호가했기에 때문에 여기저기서 구해왔다. 계산기의 전지판부터 동네 산책로에 있는 가로등 전지판과 도로에 달려있는 표지병의 전지판까지 떼어내 붙였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탓에 위성의 양 전지판은 스테인 글라스처럼 곡선의 경계를 그린다. 우주의 온도를 견디기 위해 모든 부품을 지나쳐가도록 고무 튜브를 설치했다. 고무 튜브로 냉각수가 지나가며 뜨거워진 부품들을 식혀줄 것이다. 위성의 구조만큼이나 기능도 단순하다. 위성의 기능은 오직 GPS, 즉 위치추적이다. 정지궤도위성으로 내 위치를 알려주는 것, 그것만이 위성의 유일한 임무다.
  완성률은 99%였다. 남은 부품은 단 하나, 서버용 CPU뿐이다. 위성 정도의 연산을 하려면 일반 컴퓨터에서 쓰는 CPU가 아닌 서버용 CPU가 필요하다. 그러나 서버용 CPU의 가격은 300만 원가량이다. 석 달 치 월급을 모아야 간신히 살 수 있는 부품이고, 워낙 고가라서 벌크로는 시장에 나오지도 않는다. 지금껏 월급은 벌크 부품을 사는 데 전부 쏟아 부었기 때문에 저축한 돈은 한 푼도 없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부업’을 시작했다. 잘 나가지 않는 부품을 봐두었다가 창고를 들어갈 때마다 한 두 개씩 빼내어 인터넷에 매물로 올린다. 정가보다 10%쯤 낮은 금액으로 올리면 물건은 금방 나간다. 이대로라면 한 달 후에는 서버용 CPU를 손에 넣어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다. 우주로 올라간 나의 위성은 지구를 쫓아가며 영원히 같은 자리에서 내가 있는 용산을 내려다볼 것이다.

  몇 분이 지나도록 버스는 용마루고개 위에 정차해 있다. 제자리에 선 버스의 출입문이 열렸다 닫히며 계속해서 사람들을 태우지만 버스는 움직이지 않는다. 용마루고개 아래 사거리는 꼬리 물기를 하며 넘어 들어오는 차량의 행렬에 난장판이다. 결국 버스에서 내려 고갯길을 걸어 내려간다. 효창공원역에서 지하철을 탈까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삼각지역까지는 한 정거장밖에 안 되는데다가 지하철은 타기 싫다. 역과 역 사이의 긴 어둠에 갇힐 때면 방금 어느 역을 지나쳤는지, 다음역이 어디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역에서 역으로 넘어갈 때도 바뀌는 것은 역명이 적힌 푯말뿐이다.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나 계속 같은 디자인의 역사만 반복될 뿐이다. 지하철을 타면 나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싫다.
  어제 수리를 나간 탓에 잔업이 밀려 있다. 오후 5시 전까지 들어온 주문은 다음날 배송이 원칙인데 어제는 수리 땜빵을 뛰느라 물건을 마저 포장하지 못했다. 배송장 뭉치를 집어 들고 창고로 들어가 손수레에 물건을 싣는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배송장에 적히지 않은 사운드 카드 하나를 챙겨 점퍼 안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보통 컴퓨터를 맞출 때 사운드 카드만은 따로 구매하지 않기에 사운드 카드는 늘 좋은 타깃이다. 오늘도 작업은 완벽하다. 목격자도 없었고 값도 꽤 받을 수 있는 녀석으로 가져갔으니 말이다.
  손수레를 끌고 매장으로 들어가는데 사장이 나를 보며 오라고 손짓한다. 사운드 카드가 점퍼 속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린다. 카운터에 앉은 사장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내게 말한다.
  “지금 애들이 출장 나가서 그러니까 물건 받으러 네가 좀 갖다 와라.”
  귀찮은 일이다. 오토바이에 앉아 맞는 겨울바람은 전혀 달갑지 않지만 훔친 사운드 카드를 지닌 채로 변명거리를 늘어놓으며 사장 앞에 서있고 싶지는 않다. 
  “아 네, 어디로 가서 뭐 받아오죠?”
  “그 있잖아, 이촌역 쪽에 새로 지은 오피스텔. 거기 3904호 가서 CPU 여덟 개 받아와. 싸인 하기 전에 수량 꼭 확인해라. 하나라도 아작 나면 알아서 하고.”
  상가 밖으로 나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아침보다는 나았지만 한강로에는 차들이 늘어서 있다. 아직도 건물 옥상의 시위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전경버스는 두 대가 늘어, 모두 네 대가 건물 앞 차도를 막아서고 있다. 고개를 들어봤지만 전경버스 너머는 폴리스라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오피스텔 건물 현관의 유리문에는 아직도 파란색 보호필름이 붙어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9층으로 올라간다.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이다. 3904호의 초인종을 누르자 이윽고 문이 열린다. 사무실 안에는 문을 열어준 남자뿐이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상자 더미를 가리키며 말한다.
  “옆에 수령증 있으니까 싸인 하시고 가져가세요.”
  미리 가져온 종이 상자에 담다가 문득 제품명이 눈에 들어온다. 'Intel Xeon E5360' 서버용 CPU다. 그것도 최고성능을 자랑하는 초고가 부품이다. 18개월마다 마이크로칩의 밀도가 두 배가 된다는 무어의 법칙의 주기를 방금 넘어선 작품이다. 이 정도 성능이면 내 위성의 두뇌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무실을 걸어 나오며 몇 번이나 세어봤지만 사장이 말한 대로 여덟 개뿐이다. 돈을 모아서 사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1층으로 내려가 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복도를 둘러본다. 복도 한쪽 끝에 난 커다란 창으로 용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제 오늘 시위를 해대던 건물도 보인다. 건물 옥상 위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옥상 위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빨간색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은 이따금씩 건물 아래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경찰들은 건물 앞을 지나는 골목길을 모두 막고 있다. 시위가 끝나더라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한강로 한편을 막아선 살수차의 호스는 건물 옥상을 향해 꼿꼿이 서있다.

  배달로 밀린 일까지 하는 바람에 퇴근시간이 한 시간이나 늦어지고 말았다. 일을 마치고 점퍼를 챙겨 입는데 사장이 다가와 하얀 봉투를 건넨다. 그러고 보니 월급날이다. 원래 월급날에는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며 나만의 인공위성에 쓰일 벌크 부품을 사 모았다. 이제는 딱히 필요한 부품이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자상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서버용 CPU가 벌크로 나온 게 있냐고 묻지만, 서버용 CPU가 어떻게 벌크로 나오느냐며 비웃음만 당하고 만다.
  용산역 앞 골목은 어느덧 분홍빛으로 가득 찬다. 문득 126호 여자가 떠오른다. 용산역 앞에서는 뚜쟁이 할멈들이 남자들의 팔목을 잡아끈다. 골목으로 들어가 126호로 향한다. 여느 때처럼 그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겨울임에도 하얀 탑만 입고 있는 그녀의 가슴골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의 팔에는 붉은 생채기가 돋아있다. 126호에서 다른 여자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며 나에게 말한다.
  “한 번에 오만 원. 들어왔다 가세요.”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골목을 빠져나온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가끔 간 곳 했던 그런 곳인데 이상하게도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골목을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낮에 빼낸 사운드 카드를 카메라로 찍어 인터넷 카페에 매물로 올린다. ‘★[미개봉 정품] Asus Xona HDAV 1.3 사운드 카드★ 완전 미개봉 상태 · 품질 보장 · 가격절충 안됨’ 이 녀석은 가격이 꽤 나가는 부품이다. 못해도 18만 원은 무난하게 받을 수 있다. 컴퓨터를 끄고 지하실로 내려간다. 위성은 지난밤의 모습 그대로다. 가슴을 벌린 위성 안에는 단 한 개의 부품만이 비어있다. 오후에 배달해온 최신 서버용 CPU를 내 위성의 빈자리에 끼워 넣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위성과 로켓의 상태를 점검한다. 위성을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먼저 로켓부터 살핀다. 3단 로켓으로 재질은 텅스텐이다. 텅스텐은 녹는점이 가장 높은 금속 중에서도 가장 가격이 쌌기 때문에 재료로는 최적이다.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텅스텐 가공업체에 제작을 의뢰했다. 입대하기 전까지 모았던 돈을 여기에 모두 써버렸다. 로켓의 각층 하단부에는 연료통과 점화장치가 달려있다. 1단으로 성층권까지, 2단으로 열권까지, 마지막 3단은 위성을 우주궤도 위에 올려줄 것이다. 로켓의 연료도 준비가 끝났다. 로켓 연료로 쓰는 액화수소는 구할 길이 없어 포기하고 나만의 로켓연료를 따로 제작했다. 먼저 땅을 박차고 올라갈 추력을 얻게 해줄 연료로는 부탄가스를 낙점했다. 한 번에 강하게 폭발해야하므로 컴프레셔로 다섯 개를 한 통에 눌러 넣었다. 이렇게 만든 다섯 통의 압축부탄 가스가 로켓을 띄우면 2단과 3단에 충전시켜 놓은 등유와 시너가 타오르면서 대기권 바깥으로 로켓을 날려줄 것이다. 시험발사를 해보고 싶었지만 로켓을 하나 더 만들기에는 돈도 시간도 부족하다. 로켓이 제 역할을 해낼지 알아낼 방법은 오직 발사하는 것뿐이다.
  위성의 날개를 편다. 제각각 다른 모양의 전지판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그런데 문득 빈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날개 맨 구석이 화투짝만큼 비어있다. 전지판을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십자드라이버와 빠루를 챙겨들고 마포대교로 간다. 일반 도로와 달리 마포대교의 중앙선 표지병에는 전지판이 달려있다. 자정의 강바람은 차갑다. 차들은 한산한 다리 위를 빠르게 지나쳐간다. 도로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지자마자 곧장 도로로 뛰어들어 작업을 시작한다. 먼저 드라이버로 네 개의 모서리에 달린 나사를 풀고 빠루 대가리를 표지병 아래에 쑤셔넣는다. 그런데 표지병을 들어내기도 전에 신호가 풀린다. 빠루를 발로 눌러 뜯어낸 표지병을 들고 인도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여러 개의 노란 불빛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차에 치이기 직전에 간신히 인도로 빠져나온다.

  정체가 계속될 것 같아 일찌감치 집에서 나선다. 예상대로 용마루고개부터 지독한 정체가 이어진다. 공덕동 로터리에서 삼각지역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다. 지하철이 타기 싫어 일찍 나왔지만 막상 걸으려니 바람이 차갑다.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려도 살갗으로 냉기가 스민다. 삼각지역 삼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도로 사정은 그대로다. 빨리 추위를 피하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 가게로 들어간다. 포장실로 들어가는 나를 사장이 불러 세운다.
  “저거 뜯어서 조립해서 카운터 잘 보이는 데다 진열 좀 해놔.”
  사장이 가리킨 박스를 안에는 잡다한 플라스틱 조각이 비닐에 싸여져 있다. 어제 가져온 서버용 CPU의 진열대다. 설명서를 봐가며 글루건으로 조각들을 붙여나간다. 완성된 진열대의 모습은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뒷면은 글루건에서 흐른 고무조각들이 덕지덕지 눌러 붙어있지만 앞면은 광택처리까지 되어 있어 꽤 근사하다. 가운데에 CPU를 올려놓는 자리가 있고, 양 옆에는 푸른색 스파크 모양의 플라스틱 조각이 날개처럼 달려있다.
  사장에게 창고 열쇠를 받아들고 서버용 CPU를 가지러 간다. 박스 안에는 배달해 온 그대로 여덟 개의 CPU가 들어있다. 하나쯤 가져갈까 생각해봤지만 금방 들통 날 일이다. 아쉬움을 애써 달래며 진열할 CPU 한 개만 챙겨 창고를 나온다. 포장을 뜯고 CPU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놓는다. 플라스틱 왕좌에 앉은 쇳조각 하나가 더없이 위대해 보인다.
  포장실로 들어가 본래의 업무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까지의 모든 주문량을 확인한 다음, 창고로 가 주문물량에 맞춰 물건을 가져온다. 그리고 포장실에 앉아 충격완화비닐로 물건을 둘둘 만 후 박스에 넣고, 테이프로 박스를 단단히 봉하고, 마지막으로 배송장을 붙이면 하나의 포장이 끝이 난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나의 지루한 업무다.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건 주문자를 떠올려보는 일이다. 어떤 부품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향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부품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컴퓨터에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사용자들은 컴퓨터가 고장 나면 가까운 수리 센터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부품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게이머들은 그래픽 카드를 유독 비싼 놈으로 산다. 반면 컴퓨터를 오래 쓰고 싶은 사람들은 메인보드와 CPU에 많은 투자를 한다. 이 경우는 컴퓨터에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다. 파워 서플라이만 몇 개씩 사는 주문자는 십중팔구 학교나 관공서, 혹은 기업이다. 컴퓨터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녀석이 파워 서플라이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를 주문자들을 상상해가는 일도 지루해질 즈음이다. 택배회사의 업무 마감 시간이 30분도 채 안 남았다. 겨울 해는 일찌감치 저문다. 주문량을 마저 끝내기 위해 손을 더 빨리 움직인다. 하나의 포장을 막 끝내려는 찰나에 사장이 포장실 문을 열고 나를 찾는다.
  “야, 너 일로 나와 봐.”
  또 무슨 귀찮은 일을 시키려는 것일까. 보나마나 수리나 갖다오라는 거겠지. 매장으로 나가며 포장실 문을 닫는 순간 사장은 종이 뭉치를 내 얼굴에 집어던진다. 수십 장의 종이가 낙엽처럼 내 주위로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중 하나를 집어 든다. ‘★[미개봉 정품] LG 8GB USB 메모리★ 미개봉 상태 · 품질 보장 · 가격절충 안됨’ 내가 인터넷 카페에 올린 글을 그대로 캡처한 사진이다. 내 아이디와 매장에서 빼낸 부품의 사진, 구매자와 댓글로 가격을 협상하던 내용까지 고스란히 담긴 증거다.
  “너 뭐하는 새끼야? 기껏 월급 주고 써줬더니 미친 새끼가 재고를 갉아먹어?”
  사장은 손목시계를 풀어 던지고는 나를 냅다 후려친다. 가슴 한복판을 맞아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나 사장의 발길질은 그칠 줄 모른다. 발목을 잡으면 사장은 내 머리를 들어 바닥으로 내리친다. 널브러진 종이로 피가 튄다. 보다 못한 직원들이 사장을 말린다. 사장은 씩씩거리며 수화기를 든다.
  “너 같은 새끼들은 콩밥을 먹어야 돼.”
  사장의 손가락은 또박또박 다이얼을 누른다. 112.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사장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리꽂는다. 고꾸라진 사장은 일어나려고 팔을 바동거린다. 진열대에 놓인 CPU를 집어 들고 매장을 뛰쳐나온다. 전과자가 되거나 감방에 가는 것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다만 내가 감방에 가면 월세를 내지 못해 집과 지하실은 처분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위성 발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에게 그럴 여유는 없다.
  상가를 나와 용산역 앞으로 향한다. 이제 더 이상 용산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 정체는 도무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용산을 관통하는 예광탄은 초저녁부터 불을 밝힌다. 골목 양 끝의 경찰초소가 신경 쓰여 서둘러 126호로 들어간다. 어제 나에게 호객을 했던 그 여자가 나를 구석의 쪽방으로 안내한다. 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는 그녀에게 묻는다.
  “혹시…… 그 여자분 없어요? 그…… 그저께 맞고 있던…….”
  여자는 콘돔 팩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웅얼거린다.
  “앙, 걔는 이제 안 나와요.”
  어디로 갔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관둔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으로 이직을 했는지 아니면 손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다. 여자는 브래지어를 벗으며 방구석의 텔레비전을 켠다. 나를 향해 돌아선 여자의 유두는 새까맣다. 그래도 손에 잡히는 가슴은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웠고 질 속은 아늑하고 따뜻하다. 후배위를 하다가 정액이 뿜어져 나온다. 입대 두 달 만에 남성잡지를 보며 부대 화장실에서 자위를 했을 때처럼 정액은 계속해서 쏟아진다. 어제 받은 월급을 여자에게 모두 줘버린다. 서버용 CPU를 손에 넣었으니 돈은 이제 필요 없다. 그러자 여자는 콘돔을 안 쓰고 한 번 더하라며 호의를 베푼다. 콘돔을 벗어버리고 방금 전 그 구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런데 여자의 등 너머로 보이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풍경이 낯이 익다. 용산역 앞 삼거리다. 순간 놀라서 우뚝 멈춘다. 다행히 내 얘기는 아니다. 역 근처, 건물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칠 거라는 경찰 간부의 인터뷰가 나온다. 여자의 질 안에 힘껏 사정을 하고 126호를 빠져나온다.
  전자상가를 피해 삼각지역을 돌아 용마루고개를 넘어간다. 사장의 신고에 집 앞까지 경찰이 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뒷담을 넘어 지하실로 들어간다. 위성은 어제 모습 그대로다. 주머니에서 서버용 CPU를 꺼내 위성의 메인보드에 끼어 넣는다. 위성이 완성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창고 구석에서 리어카를 꺼내 로켓 부품과 연료용기, 공구상자, 간이 발사대 부품, 노트북 그리고 조립이 끝난 위성을 싣는다. 쇳덩어리를 가득 실은 탓에 리어카는 예상했던 것보다 묵직하다. 리어카를 끌고 밖으로 나와 용마루고개를 올라간다. 이 근방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용마루고개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옥상은 위성을 계획할 때부터 발사지로 점찍어 둔 곳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의 꼭대기 층인 25층으로 향한다. 복도에 리어카를 세워두고 계단을 올라가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확인한다. 문이 고장 났는지 자물쇠가 걸어져 있다. 리어카에서 절단기를 가져와 자물쇠를 잘라낸다. 옥상과 25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부품을 하나씩 들어 옮긴다.
  로켓의 몸체를 끼우고 나사를 조인다. 철골을 연결해 발사대를 세우고 네 개의 모서리에 끈을 연결해 땅에 묶어 단단히 고정시킨다. 3m가량 되는 높이의 발사대 안에 로켓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로켓의 점화장치와 노트북을 연결해 발사준비를 끝마친다. 이제 명령어만 입력하면 로켓은 곧장 우주를 향해 올라갈 터다. 발사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려다가 순간 멈칫한다. 위성의 이름이 없다. 루나, 텔스타, 무궁화 같은 세계 각국의 위성들은 그럴듯한 이름이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 위성 껍데기에 이름을 적는다.
  ‘스푸트니크 126호’
  사라진 126호 여자가 떠오른다. 그녀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인류가 최초로 쏘아올린 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는 소련이 이미 쏘아 올렸으니 나만이 알아 볼 수 있는 숫자로 126을 붙인다. 마지막 스푸트니크였던 26호 앞에 1 하나가 더 있는 숫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숫자다. 위성이 궤도에 오르면 이제 언제 어디서든, 어디로 움직이든 실시간으로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이 찾아오면서 하늘에는 점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 다시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른다. 로켓은 부르르 떨리더니 제자리에서 불을 뿜으며 이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다. 구름이 끼지 않아 로켓의 궤적은 선명하게 하늘을 가른다. 126호는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하늘을 한 발의 커다란 예광탄처럼 붉은 꼬리를 그리며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하늘을 똑바로 향해야할 로켓의 끝이 점점 옆으로 기운다. 발사 5초 후, 로켓이 갑자기 폭발한다. 로켓은 활활 타오르며 추락한다. 로켓은 용산역 근처로 떨어진다. 그리고는 떨어진 곳에서 별안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웬 건물의 옥상에서 커다란 불길이 인다.
  겁이 난다. 리어카와 공구, 노트북까지도 다 버려두고 집으로 달려간다. 지하실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의자에 앉는다. 그 불길은 뭐였을까. 누가 죽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 위에 작업하다 남은 벌크 부품과 위성을 만들 때 썼던 공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126호는 실패했다. 라이카가 타고 간 스푸트니크 2호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소련도, 나도, 실패했다.
  막아놓은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새벽빛이 들어온다. 아침이다. 지하실에서 나와 용산으로 향한다. 위성이 떨어진 건물을 찾아다닌다. 어차피 벌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어 추적은 불가능할 테지만 내 눈으로 실패의 잔해를 확인해보고 싶다. 그리고 추락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용산역 앞 삼거리 건물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어제까지 시위가 한창이던 연탄재 색깔의 5층 건물이다. 건물의 옥상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옮겨 건물 아래로 다가간다. 전경들은 구경꾼들을 막기 위해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다. 건물 앞에 서있는 크레인의 갈고리 끝에 컨테이너 박스가 걸려있다. 새까맣게 그을린 컨테이너 박스의 벽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다. 누군가 사람이 다섯 명이나 죽었다고 소곤거린다. 다른 누군가가 여섯 명이라고 정정해 준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물러난다. 뒷걸음치는 내 발 아래에 무언가 밟힌다. 재가 잔뜩 묻은 쇳조각이다. 쇳조각을 주워 재를 닦아내자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위성에 끼웠던 서버용 CPU다. 서버용 CPU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강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등 뒤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제33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수상소감

 

 

소설을 쓰는 작업이, 시를 쓰는 작업이 이 시대에 무슨 의미를 갖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문학도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단순하지만 무거운 물음이다. 기라성 같은 문학가와 국어학자를 배출한 대학조차 스스로 문학을 내쫓아버리는 시대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퍽 몽상적인 도피행위다. 그러나 시대가 문학을 외면할수록 글쓰기는 저항을 향하게 된다. 부(富)가 인간 최고의 덕목인 사회에서 돈 안 되고 취직 안 되는 작업을 자처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반항적이고 치열한 행위인 셈이다.


이런 고민을 문학도들에게 부여한 지금의 세태 속에서 계명문화상의 존재는 더없이 소중하다. 작품 출품의 기회를 제공해주신 계명대신문사 관계자분들에게, 여물지 못한 글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보시고 수상의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계명문화상을 꾸려주신 모든 분들께 앞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내보일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마련하여 문학도들의 저항을 돕는 ‘공범’이 되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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