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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궁지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6-05-30 12:55:40

(이어서)

도망갈 생각 말아, 이 산에 묻어줄 테니까.

김 실장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검은 천으로 뒤덮인 주위 어디에서도 사람의 형체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다시 야산을 뛰어올랐다. 다급한 발소리들이 남자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남자는 관목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두 번째 휴식을 취했다. 이번에는 사람 머리만 한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이마로 들러붙었고 얼굴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더 이상 뛸 힘도 뛰어갈 길도 없었다. 남자의 뒤로는 바위로 이루어진 막다른 암벽이 앞으로는 자신을 사냥 중인 도살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세를 고쳐 앉으려다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발에 챈 돌이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지며 남자의 위치를 암시해주었다. 뒤이어 흙더미가 바스러지는 소리, 비에 씻긴 풀이 밟히는 소리,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쇠붙이가 덜거덕대는 소리가 시시각각 남자를 조여들었다. 물러설 곳이 없는 남자는 각오가 되어있었다. 조금 더 소리가 가까워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남자는 또 다른 국도에 닿아 있었다. 사고가 있었던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듯했으나 그곳과 이어진 도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남자는 차선 바깥쪽에 웅크리고 앉아 비에 젖은 노면을 바라보았다. 바퀴가 달리지 않는 도로는 쓸모없는 공간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남자는 불도 붙이지 못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태워줄 차량이든, 자신을 곤경에서 꺼내 줄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팔트로부터 스며든 한기가 남자의 이를 맞부딪게 했다. 남자는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한쪽 끝을 응시했다. 어둠은 도로와 대기의 경계마저 지워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끝을 모르게 팽창하고 있는 듯 보였다. 동시에 어둠은 아스팔트와 가드레일, 차량, 빛마저도 빨아들이고 있었다. 종국에는 남자 자신마저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남자는 한동안 그 두 가지 생각에 갇혀 있었다.

어둠의 끝으로 작은 불빛이 떠올랐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에 몸을 드리웠다. 두 눈을 홉뜬 차량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어둠에 묻혀있던 남자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남자는 위험을 느끼면서도 양팔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것만이 남자에게 허용된 유일한 수단이었다. 점점 커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삽자루가 먼저 내리쳐졌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피했고, 예리하지 못하게 휘둘러진 삽자루가 등 뒤의 벽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이어 손도끼가 남자의 옆구리를 노렸다. 이번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구석에 몰린 남자의 손도 기회를 노렸다. 아주 짧은 시간의 간격이 발생했을 뿐이지만 성패의 결과는 참혹했다. 바위가 조금 더 빨리 내리쳐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상대의 머리를 짓이겨놓았다. 사나운 비명이 흘러나왔고 손도끼가 허공을 마구 휘저었다. 남자가 위기를 모면하려는 순간, 삽자루가 남자의 등을 후려쳤다. 남자의 몸이 손도끼에 부딪히며 앞으로 굴렀다. 둘은 엉클어지며 비탈을 내려갔다. 삽자루가 욕지거리와 함께 뒤를 쫓았다. 남자가 나무기둥을 들이박고 나동그라졌다. 가지에 맺혀있던 빗물이 남자의 얼굴로 한가득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손도끼가 느릿느릿 남자의 발목을 노리며 들어왔다. 남자가 가까스로 몸을 굴렸고, 쥐어짜 낸 힘으로 내리쳐진 손도끼가 나무에 찍히며 주인의 손을 벗어났다. 몸을 일으킨 남자가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어느새 바짝 따라붙은 삽자루가 남자의 허리를 치받았다. 남자가 나무를 부둥켜안다시피 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또 도망가 봐. 개새끼야.

씩씩거리는 삽자루가 남자의 머리를 향해 다가와 날을 세웠다. 남자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돌에 머리가 깨진 자의 울먹거림이 빗물과 함께 땅으로 고여 들었다. 셋은 사건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삽자루가 남자의 머리를 조준한 채 뒤로 한껏 젖혀졌다. 마지막을 결정지을 일격이 남자의 머리를 박살 내려던 찰나, 남자의 품 안에 있던 손도끼가 삽자루의 정강이를 찍었다. 뒷걸음질 치던 삽자루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어둠이 신음과 밭은 숨소리로 들끓었다.

 

짐칸에 방수포를 뒤집어쓴 화물트럭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도로 한편에 멈춰 섰다. 보조석의 차창이 내려지자 차 안에 갇혀있던 트로트 음악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운전자는 남자를 향해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남자는 빠른 박자에 묻힌 운전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레짐작으로 대답해주었지만 운전자는 대꾸가 없었다. 이내 트로트 가수의 구성진 음성이 한결 잦아들었다.

어디로 간다고요?

운전자의 손짓에 남자는 보조석 문을 열어 화물차에 올라탔다. 차 문을 닫기 무섭게 화물트럭은 다시 도로를 따라 내달렸다.

운전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려던 남자는 놀라고 말았다. 운전자의 인상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달아 기어를 변속하며 속력을 내기 시작한 노인이 남자에게 뽕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남자가 마지못해 그렇다고 답하자 카오디오의 볼륨이 다시금 높아졌다.

노래를 안 들으면 잠이 와서 말이지.

남자는 요란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개의치 않았다. 노인에게 라이터를 빌려 담배를 피웠다. 한 뼘 정도 내린 차창으로 비가 들이쳤다. 남자의 뺨을 타고 빗물이 흘렀다.

길을 잃은 게요?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남자의 행색을 살피는가 싶더니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남자는 대부분 대답을 망설이거나 회피했다. 갈수록 남자의 답변이 시원치 않자 노인이 남자의 태도를 비꼬았다.

나 아니었으면 거기서 계속 떨고 있었겠네.

남자는 백시트에 몸을 묻은 채 창밖의 볼품없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며,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와 같은 쉽사리 답을 찾을 수 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영락없이 궁지에 몰린 꼴이었다. 남자는 빠져나갈 수를 찾기 위해 장고를 거듭했다. 그럴수록 고된 남자의 육체는 무의미한 생각을 멈추라는 듯 남자를 잠 속으로 끌어당겼다. 꽁초를 창밖으로 버린 남자는 불빛 한 점 없는 시커먼 국도를 내다보며 졸음을 견디려 애를 썼다. 노인은 여전히 저 혼자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남자는 노인의 말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끄덕거림은 곧 주억거림으로 바뀌었다. 트로트 음악과 차체에 부딪는 빗소리와 노인의 음성은 남자의 졸음을 방해하기는커녕 부추겼다. 어느 순간 남자는 잠시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눈꺼풀이 닫히며 검은 장막이 남자의 눈앞에 드리웠다. 몽롱한 의식 사이로 들려온 노인의 음성이 검은 장막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자네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구만.

남자는 그제야 노인의 얼굴이 교회에서 마주친 노인과 닮아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이윽고 시끄러운 음악도 아랑곳없이 긴장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조수석에 기대 잠이 들었다.

 

남자는 음악 소리가 거슬려 잠에서 깼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요란한 트로트 음악이 차 안을 맴돌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남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앞을 내다보았다. 심야의 국도 위를 달리는 차량은 자신이 탑승한 차뿐이었다. 남자는 불쾌한 꿈을 꾸었다. 목이 죄어드는 느낌에 갈증이 일었고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있었던 탓에 온몸이 저려 왔다. 담배를 꺼내 물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일회용 라이터가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잠꼬대를 다 하시고.

남자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은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김 실장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남자의 잠꼬대를 모두 기억한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남자는 차창을 내리며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여지없이 후배의 두 눈과 마주쳐야 했다.

짧은 터널을 통과하자 헐벗은 땅 위로 불 켜진 건물이 솟아났다. 국도로부터 건물로 들어서는 진입로에는 ‘24시간 편의점이라 쓰인 입갑판이 세워져 있었다. 남자가 앞 유리창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잠깐 세웠다 가지.

김 실장은 대꾸하는 대신 남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남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듯싶어 재차 말해주었다. 백미러를 통해 후배와 시선을 나눈 김 실장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앞에 세단이 멈춰 섰다. 남자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김 실장이 운전석 문을 열었고 후배는 기다리겠다며 차 안에 머물렀다. 남자가 발걸음을 돌려 뒷좌석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음료수라도 마셔.

후배는 사양했다. 남자는 끈질기게 권하며 후배를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뒤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못마땅한 표정의 후배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보기보다 후배의 체격이 크다고 생각했다.

셋은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남자가 앞장서 문을 열고 들어섰고 둘은 말을 주고받으며 출입문 밖에 잠시 머물렀다.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나 남자는 둘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셋은 냉기가 서린 냉장 쇼케이스에서 저마다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남자가 계산을 하는 사이 김 실장은 밖으로 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남자는 후배를 데리고 편의점 밖에 놓인 파라솔 아래에서 담배를 피웠다. 남자는 차 밖에서도 후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힘깨나 쓰겠어.

남자의 말에 후배는 웃지도 머쓱해 하지도 않았다. 입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흙이 담긴 항아리에 담배를 비벼 끈 남자가 먼저 차로 다가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김 실장이 뒷좌석에 올라타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밖에 서 있던 후배가 남자와 김 실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후배의 얼굴이 조금은 성난 듯 보였다.

앞에 타시죠. 자리도 지저분한 데.

김 실장의 미소 띤 얼굴이 남자에게 말했다. 이미 뒷좌석 문을 닫은 남자가 대답했다.

한숨 자려고.

꽁초를 발로 비벼 끈 후배가 남자를 노려보며 조수석 밖에 머물렀다. 그때까지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김 실장이 알겠다는 듯 시선을 거둬들였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후배가 바닥에 침을 뱉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세단은 다시 도로에 진입했다. 후배가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라디오에선 종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김 실장의 말과 달리 뒷좌석은 구겨진 휴지 한 장 없이 깨끗했다. 단지 어디서 본 듯한 물건 하나가 남자의 발치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일기예보 탓이기라도 하듯 때마침 앞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와이퍼가 켜지고 빗물이 쓸려갔다 다시 맺히길 반복했다. 라디오의 볼륨이 높아지며 빗소리를 잠식했다. 세단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노면을 지치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남자가 자신의 발아래 놓인 표지 없는 성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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