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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연착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5-05-18 18:07:06

 

●제35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연착

윤이삭(동아대학교·문예창작학·2학년) 





  첫 출근 길,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버스는 아파트 단지를 지나, 도시의 잘려나간 귀퉁이에 나를 버리고 떠났다. 농밀한 적막이 늪이 되어 발을 더 굼뜨게 했다.
  조금 걸으니 약도에 적힌 것처럼 굴다리가 나왔다. 굴다리에 웅크린 어둠이 혀를 낼름거리며 나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껏 어둑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굴다리 속을 낙하했다.
  굴다리의 끝에 다다르자 내리치는 단두대의 칼날처럼 빛이 쏟아졌다.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고, 최후의 눈물 같은 것이 어두운 마음과 섞여 조금 흘러내렸다.
  환한 장막을 걷어내고 익숙해진 눈을 뜨니 광활한, 세계였다. 땅은 증식하는 원주율의 숫자처럼 아득했고, 하늘은 사라지지 않을 돌을 쓰다듬는 겁(劫)의 천처럼 땅을 무한히 쓰다듬고 있었다. 문득 하늘에는 천구(天球) 같은 게 느껴져 생경하게도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천구에 듬성듬성 돋아난 양털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지평선의 끝에는 위병소가 아스라이 매달려있었다. 위병소를 배경으로 두 명의 헌병이 장승처럼 서있었다. 둘의 대화가 바람에 실려 전해졌다.
  씨발, 시간 겁나게 안가지 않냐? 그렇지 말입니다.
  들판에 카펫처럼 깔려있는 갈대 옆으로는 기차 역사가 있었다. 전면에 투명하게 얼어있는 유리창이 지나치게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문명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뽐내듯이, 이 외딴 곳에 인류의 기념비는 추위를 버티며 서있었다.
  역사로 들어가려는데 들판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일렁이는 갈대들의 살 부딪는 소리 사이로 규칙적인 파열음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행과 열을 잘 맞춰 서있던 갈대들이 도미노처럼 마구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길가에 접해 서있던 갈대가 마저 쓰러지고, ‘그것’이 길 위에 올라섰다. 멧돼지였다.
  멧돼지라니. TV나 영화 속에서 보아왔던, 심지어 온라인 게임에서 수 천 마리는 사냥해보았을 그 멧돼지였다. 그러나 앞에 놓인 실물의 ‘그것’을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쪼개진 나뭇결 같은 털이 온몸에 뒤덮여 있었고, 거대한 나무 밑동 같은 네 개의 다리로 ‘그것’이 서있었다. 무엇보다 세계를 압도하는 크기가 문제였다. 이 거대함은 흡사 기차가 아닌가. 역사와 나 사이에 놓인 ‘그것’은 어쨌거나 멧돼지라 부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멧돼지는 두툼한 다리를 움직여 다가왔다.
  눈앞이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깜박, 하고 열렸다 닫혔을 뿐인데 멧돼지가 탁구공 굴러오듯 옆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일순 세계의 풍경이 포즈를 취하듯 정지했고, 가슴께에서 아마추어의 탁구경기 같은 것이 열렸다. 심장이, 그야말로 격렬하고 어설프게 스매시를 반복했다.
  “저기…… 안녕?”
  나는 살가운 길고양이라도 만난 듯 말을 건넸다. 나를 쳐다보는 멧돼지의 눈빛은 길고양이는 커녕 호랑이가 마주 하더라도 몸을 움츠릴 만큼 매서운 것이었다. 멧돼지는 코를 푸르릉, 하고 풀었다. 총구처럼 깊은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콧물이 찬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고, 멧돼지는 내 옆에 앉았고, 불어온 바람이 나와 멧돼지 사이를 메우다, 지나갔다. 어쩌면 좋을까. 갈대밭에서 변사체로 발견 된 공익요원… 그는 첫 출근을 앞두고 근무지인 역사 앞에서 숨진 채 발견 되었다. 사체의 훼손 정도가 매우 심하며… 자세한 사인은 경찰이 조사 중이며… 같은 문구들이 머릿속에서 널을 뛰었다.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여 보았다. 사후경직이라도 된 듯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이미 반쯤 죽어 있는 내가 멧돼지에게 빌었다. 멧돼지는 하나의 판결만을 손에 쥔 재판관처럼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멧돼지가 피고를 조사하듯 나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코를 나의 몸에 밀착시키고는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손에 이르러 집요하게 냄새를 맡아댔다. 멧돼지는 사소한 증거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멧돼지의 움찔거리는, 촉촉한 코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나의 죽어있는 반쪽 옆으로 나머지 반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실실 새나오는 것이었다. 손을 핥기 시작한 멧돼지의 혀가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멧돼지의 뻗어 나온 거대한 어금니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틀리면 죽는다, 라는 생각이 고동치는 피를 따라 온몸을 순환했다. 멧돼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겠다는 요량으로 손을 뻗어 거친 털을 쓰다듬었다(길고양이에게는 흔히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이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손길을 따라 몸뚱이의 근육이 산등성이처럼 융기하더니 멧돼지는 혀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험상궂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멧돼지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더니 역시나 거대한 코로 나를 툭툭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나자빠졌다.
  “저게 뭐야?”
  들판을 가로질러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두 헌병이 멧돼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 * *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미국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주장한 말이다. 보험사 직원이었던 그는 숱한 사고들을 봐야만 했다. 일간지처럼 날아드는 타인의 비보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샤워 물줄기를 급하게 끄며, 생각했다. 나에게도 끔찍한 사고가 들이닥치면 어쩌지? 그 생각은 손에 박힌 가시처럼 집요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 이어졌고 식욕이 없어져 9.4파운드나 살이 빠졌다. 불과 2주 만의 일이었다. 같은 회사 직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하인리히 씨, 요새 안 좋은 일 있대?
  그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자신이 처리한 사고들을 되짚어보았다. 지나간 사고들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형태로 같은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박제된 사고들은 힘을 잃고 온순해져 있었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안심이 됐다.
  어김없이 지난 사고들을 훑고 있던 날, 그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사고들이 서로를 엮으며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한 곳에서 작은 사고나 징후가 나타나면 그 이후에 같은 장소에서 반드시 큰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역시나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데이터를 토대로 1:29:300 법칙을 발표한다. 사고로 1명의 중상자가 나왔다면, 그 이전에는 29명의 경상자가, 더 이전에는 300명의 잠재적 부상자가 있다는 법칙이다.
  하인리히는 그제야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사고는 더 이상 예측 불가능 한 것이 아니었다. 주말에는 16시간을 내리 잤다. 혈색이 돌아오고, 얼굴은 팽팽하니 윤기가 흘렀다. 직원들은 또 다시 수군거렸다. 하인리히 씨, 요새 좋은 일 있대?
  며칠 후 하인리히는 출근길에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신호를 무시한 차량이 그대로 다리를 받아버렸다. 전치 8주의 진단을 받고 목발을 짚은 그는 이전보다 더욱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비단 부러진 다리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하인리히는 생각했다. 이것은 1일까, 29일까, 300일까?

* * *
 
  사고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그러나 불현 듯 찾아들었다.
  “길을 잃었던 걸까요?”
  나는 여러 사람의 추궁 끝에 쥐어짜내듯 대답을 내놓았다. 말끝에 목이 매달린 의문부호 탓에 대답이라 하기도 뭣하지만 어쨌거나 그때의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나는 스스로에게도 말해본다. 길을 잃었던 걸까요?
  하지만 나는 사고의 목격자로서, 혹은 일말의 책임자로서 사고를 해명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전에 보았던 멧돼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멧돼지는 들판을 가로질러 빌딩 숲처럼 솟은 갈대들을 헤치고 기억의 수면에 두둥실 떠올랐다. 기억 속 멧돼지는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하게, 작아져 있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지극히 평범한 날들 중 하루였다. 하지만 돌이켜볼수록 그 하루는 수상쩍고, 의심스러운 복선들로 제 모습을 바꿔갔다. 먼저, 그 날은 역장의 아침인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빨리, 빨리 다녀라.”
  역장은 늘 이런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내가 역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올라치면 움직임을 감지해 반응하는 뻐꾸기처럼 소리를 빽 질렀다. 역장은 출근시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늘 같은 소리였다. 내가 일찍 도착하더라도 그랬다는 말이다. 그 모습이 너무 괘씸해서 하루는 1시간 30분이나 일찍 역무실에 도착했다. 막 동이 틀 무렵이었고 그래서 몹시 추웠다. 바람을 막으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문을 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리, 빨리 다녀라.”
  역장은 망부석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 꺼진 역무실에서 흐려진 실루엣 가운데 두 안광만이 짐승처럼 빛났다. 조금, 무서웠다.
  역장은 정년퇴직을 1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떨어지는 나뭇잎도 피한다는 말년 병장처럼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운 만큼이나 신경질을 부려댔다. 늘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훈수를 두고, 먼지 한 톨도 어제와 다름없게 정리해야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실제로, 곧 균형을 잃고 넘쳐흐를 듯한 나날을 역장은 표면장력으로서 팽팽한 수평을 유지해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진 말이다.

  역사에서 하는 일이라곤 기차가 오고, 가는 걸 지켜보는 일이 전부였다. 이따금 잡일이나 심부름을 하곤 했지만 그마저 드물었다. 승객들의 안전을 도모한다거나 안내를 하는 것이 국가로부터 공익요원인 내게 하달된 임무였지만 내가 없이도 스스로 잘 굴러갔다. 그래서 나는 숨죽인 물미역처럼 한들거리며 제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기차는 플랫폼에서 보이는 철도의 너머에서 부지런히 달려왔다. 그리고 승객들을 뱉어내고, 새로운 승객들을 집어삼키고는 반대편 너머로 사라졌다. 기차는 늘 어딘가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떠났다. 수십 대의 오고, 가는 기차들을 하루 종일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전국에 깔린 철길만큼이나 아득해졌다.
  시간도 오고가는 기차를 따라 흘러갔다. 그러나 시간은 시원스레 철길을 내달리는 기차와는 달리 움찔움찔, 머뭇거렸다. 머뭇거리며 쌓이는 시간의 퇴적 속에서 나는 말라붙은 물미역이었고, 그래서 시간이 너무 무거웠다. 누군가 시간을 복기하며 켜켜이 쌓인 시간의 표층을 벗겨낸다면 거기엔 화석이 된 물미역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것이다.
  이른 아침, 나는 어김없이 자리에 서있었다. 플랫폼에는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과 작업복 차림의 일일 노동자들이 엉켜있었다. 복장은 다르지만 표정들은 하나같이 초조하고 피곤해보였다. 기차가 연착이 되었다. 기차는 이따금 여러 가지 이유로 늦게 도착하고는 했다. 엇갈리는 기차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정차를 하거나, 기차 승객들에게 문제가 있다거나(테러리스트 같은 심각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 기장이 대변이 급했다거나 하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를 어림짐작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이런저런 이유를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기차에 오르는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탑승이 늦어졌다던가, 이삿짐 같은 할머니의 보따리에서 배추나 사과 따위가 굴러 떨어져 기장이 주워야만 했다던가, 이제 정말 출발하려는데 웬 오리 떼가 쫑쫑거리며 선로를 막았다던가 하는 식의 상상이었다.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았던 승객이 기차를 세웠다거나,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장난 전화를 받는 상황은 단골 소재였다.
  평범한 상황을 지나쳐 상상은 늘 극단적으로 비약했다. 승객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정말로 폭발물을 발견했다던가, 매일 같은 선로를 달리는 것이 지겨워진 기장이 멋대로 다른 선로를 선택했다던가, 선로 끝에 갑자기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거나. 그러나 늦게 도착한 기차는 어김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오고, 갔다.
  조금 늦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도착한 기차는 승객들을 집어삼켰다. 승객들은 서둘러 기차에 몸을 우겨넣었다. 기차에 올라탄 승객들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승객들은 자신에게 지정된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일상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에게서 안락한 권태로움이 묻어났다.
  출발하는 느릿하고 둔중한 기차의 움직임에서 낯익은 얼굴이 유리창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의 얼굴과 겹쳐 유리창에 반사된 내 얼굴이 비쳤다. 속도를 높여가는 기차 속에서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커지는 걸 보았다. 동시에 끔찍한 것을 마주한 것 같은 나의 얼굴도 유리창에 비쳐 보였다. 그 얼굴은 분명 내 것이었지만 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을 잠그고 귀를 막았다. 그러나 물꼬가 터진 기억의 댐은 방류를 멈추지 않았다. 온몸은 그때의 기억으로 적셔지고, 차올랐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숨 쉬기가 어려워졌다. 흘러넘치는 기억들은 급한 물살을 유지하며 부서진 잔해들을 몰고 왔다. 잔해들이 날아와 박혔고 나를 찢고 분해했다. 수위를 넘어선 기억들이 찢어진 나의 내부로 범람했다.  그리고 짙고, 공격적인 이명이 찾아들었다. 심전도계가 내는 한 인간의 끝을 알리는 소리와 닮아있다. 나는 세상의 전경이나 후경으로 멀리 사라졌다. 이윽고 이명이 잦아들고 나는 깊은 침묵에 잠겨든다. 시간도 흐르지 않고,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호흡도 사라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물에 빠진 듯 온몸이 땀에 젖었다. 소리는 수평선을 넘어오는 범선처럼 차차 다가왔다. 소리는 그야말로 세계 자체였다. 소리는 여백을 남기지 않고 세계를 가득 채웠다. 나는 흘러드는 소리를 느끼며, 자궁을 찢고 낯선 세계에 당도한 생명처럼 몸을 떨었다. 몸이 저리고, 불쾌한 두려움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나는 갓 태어난 듯한 하얘진 머리로 화장실을 나섰다.
  역무실은 소란스러웠다. 역장은 나를 감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 있었어?”
  화장실에 있었다고 하기엔, 나는 너무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귀향한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래서 역장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역장은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이 새끼가 말 안해?”
  역장이 다가오더니 손을 치켜 올렸다. 이어 손이 허공을 가르며 내 머리통에 불시착했다. 서투르고 급한 착륙이었고, 그래서 복잡 미묘한 충돌음이 발생했다. 역장의 손이 망가진 기체처럼 덜덜 떨렸다.
  “네가 해야 될 일이 뭐야?”
  역장은 계속해서 물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바다처럼 새파랗고 건강한 물미역이 춤을 추었다.
  “네가 자리 비운 사이에, 어?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 어?”
  역장은 어? 사이에 검지로 내 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물미역이 검지에 따라 몸을 움츠렸다.
  “네놈 때문에 승객이 다리가 부러졌어. 어?”
  어떻게 내가 승객의 다리를 부러뜨렸는지 쉽게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내가 다리를 부러뜨린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역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관에 눕듯, 자신의 의자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역장이 역무실을 나가자 한 직원이 찾아와 사건의 전말을 속삭여 주었다. 이곳에 온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출내기였고, 역장의 눈치를 심하게 보던 인물이었다.
  “네가 없는 새에 어린애가 기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뎠지 뭐냐.”
  다리가 부러져 우는 아이가 떠올랐다.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엄마를 찾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직원은 좌우를 살피더니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 가. 대기업.”
  감시라도 당하는 듯 소리 죽여 말하는 직원의 목소리엔 여백이 많았다. 뜨듯한 직원의 입김이 귀를 간지럽혔다.
  역장은 내가 직무 유기를 했다며 며칠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부주의를 탓하며 역에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탈한 나날을 꾸려왔던 역장은 자신의 아이가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것 마냥 매일 같이 화를 냈다. 역장은 기어코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나를 벌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모색했다. 내가 옆에 앉아있는데도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5일간 복무일이 늘어났다.
  “저 새끼가 올 때부터 재수가 없었어. 웬 멧돼지도 나타나더니.”
  억울했지만 나는 멧돼지에 밟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마주친 이는 중학교 때 알고 지낸, 종혁이었다. 종혁은 이후로 매일 같이 역에 나타났다. 키는 중학교 때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덩치도 컸다. 푹 눌러쓴 모자와 채도가 낮은 색의 옷으로 온몸을 뒤덮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살면서도 흐릿한 인상을 남겼을 거란 생각이다. 내가 그를 몰랐다면 말이다.
  종혁은 아침 일찍 기차를 탔다. 돌아오는 길은 보지 못했다. 내 퇴근시간인 6시를 넘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종혁은 다른 이들처럼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나, 기차에 오르고,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향해 달려갔다.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관성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종혁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처음 마주 할 때보다는 덜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누군가 주문하면 코끼리만을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종혁이 그랬다. 신경 쓰지 않고 싶었지만 종혁이 나타나면 온 신경이 저절로 그곳을 향했다. 종혁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안전선 앞에 섰다. 그리고 꼿꼿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말이다.
  힘을 잃은 겨울이 절름발이 오리처럼 절뚝거렸다. 종혁과 마주친 지도 2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종혁은 늘 아침 제 시간에 나타나 기차를 타고 사라졌다. 종혁이 나타난 이후로는 더 이상 플랫폼에 서서 한들거릴 수 없었다. 나는 종혁의 뒷모습을 보며 건조된 미역처럼 빳빳한 뒷목을 주물러야 했다.
   싸늘하던 플랫폼에 훈훈한 바람이 관통했다. 얼어있던 플랫폼이 기지개를 켜며 금관악기처럼 웅웅 울어댔다. 봄은 정권교체를 꿈꾸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승객들의 옷도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여느 봄날이었고, 여느 때와 같은 기분으로 한들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종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이었고, 연착되지 않은 기차가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종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종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는 이상하게도 종혁이 있을 때 보다 더 불편했다. 덩치 큰 코끼리는 부재함으로써 더 큰 존재감을 발휘했다.
  어느새 미끄러지듯 기차가 도착했다. 승객들은 일사분란하게 기차에 몸을 실었다. 승객들이 좌석에 몸을 파묻을 때 까지도 종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의 옆구리가 부드럽게 닫힐 때였다. 에스컬레이터 위쪽에서부터 다급하고 육중한 발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것이 종혁의 발소리라고 확신했다. 역시나였다. 종혁은 성난 코끼리처럼 에스컬레이터를 내달렸다. 에스컬레이터의 속도가 더해져 엄청난 속도를 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차는 닫혀버렸다. 기차는 곧 출발할 터였다. 종혁은 기차를 쫓아 내달렸다.
  “저기요! 저기요!”
  분명 울림통이 큰 종혁의 목소리는 기장에게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장은 개의치 않고 기차를 출발시켰다. 기차가 달아나는 뱀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종혁이 몸을 구부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중학생은 들짐승에 가깝다. 남학생일수록 더 그렇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과도기에 놓인 이들은 차라리 야생의 법칙을 선택한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한 반에 가둬진 어린 짐승들은 서열 정리를 위한 힘겨루기를 한다. 인상을 잔뜩 구기고는 말의 어절 사이마다 욕을 끼워 넣거나, 교실 온갖 군데에다가 희한한 방식으로 침을 뱉으며 영역표시를 한다. 실은 이런 과도한 쇼맨십은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얕보이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상대의 두려움을 만나 더욱 증폭됐다. 이러한 점에서 태수는 정말이지, 달랐다.
  태수는 스킨헤드에 가까운 머리로 교실의 뒷자리 창가에 앉아있었다. 햇빛을 받은 머리가 전구처럼 빛났다. 그 화려한 빛의 반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수사자의 갈기처럼 머리를 풍성하게 기른 녀석이 무리를 이끌고 태수에게 다가갔다.
  “이야, 머리가 빡빡이네?”
  그리고 실소를 흘렸는데, 그것이 미처 공기 중에 퍼지기도 전에 수사자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점심시간에는 수사자 뒤에 있던 무리가 태수 곁에 모여 조용히 점심을 먹고 있었다.
  태수는 다른 아이들이 단발령과 싸우는 선비들처럼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를 외칠 때 스킨헤드를 고수했다. 그 머리는 일종의 심벌로써 다른 아이들과 태수를 구별시켰다. 태수는 공부도 잘했다. 외국에서 살다 온 적이 있어 특히 영어를 잘했는데 영어 시간만 되면 어렵고 짓궂은 질문으로 선생님을 당황스럽게 했다. 자신만이 가진 개똥철학도 특이했다.
  “난 공부 못하는 새끼는 용서해도, 철권 대전 격투 게임인 철권 시리즈
 못하는 새끼는 용서 못한다.”
  재밌었다. 그 철학이 나를 노리기 전까진 말이다.
  어느 날 교실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책상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태수가 서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 철권 할 줄 아냐?”
  오락실에 몇 번 가서 해본 적은 있었지만 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못하는데?” 했더니 방과 후에 남으라고 했다. 알았노라고 했다. 방과 후 태수는 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더니 배에 냅다 주먹을 갈겼다.
  “이게 붕권이란 거야.”
  숨이 막혔다.
  “그리고 이건 풍신권이란 거지.”
  이번엔 턱.
  “그리고 이건 초(超) 풍신권이야.”
  이번에도 턱. 태수의 주먹에선 망설임이 없었다. 태수에게선 뭐랄까, 게임을 하고 있는 듯 천진함만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붕권과 풍신권은 철권 캐릭터의 기술이었다.
  나는 피떡이 된 얼굴로 오락실에 끌려갔다. 태수가 동전 5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철권3에 나란히 앉았다. 첫판은 태수가 이겼다. 태수는 역시나, 라는 얼굴이었다. 둘째판은 내가 이겼다. 태수는 어라, 하는 표정이었다. 셋째판은 태수가, 넷째판은 내가 이겼다. 다섯째 판은 치열한 공방 끝에, 어라? 내가 이겼다. 결과적으로 5판 3선승으로 내가 이긴 셈이었다. 태수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잘하잖아?”
  네가 너무 못하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터진 입술은 침묵했다.
  이후로 태수와 나는 친구 비슷한 것이 되었다. 방과 후면 오락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철권을 했다. 하다 보니 나도 재미가 붙었다. 현실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화면 속에는 있었다. 내가 태수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비록 캐릭터였지만 말이다.
  알고 보니 철권에도 스토리라는 게 있었다. 두 주인공 헤이하치와 카즈야는 부자인데 서로 싸운다. 죽이기 위해 싸운다. 실제로 서로를 죽이기에 성공하는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부활해서 돌아온다. 3탄에 이르러 카즈야의 아들인 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카즈야와 진도 서로를 죽이려든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는 중요치 않고 그저 여러 캐릭터들이 싸움질을 하는 게임이었다. 태수와 나는 하루에 수십 번씩 주먹을 주고받았다.
  태수와 함께 다니니 학교에 있는 어떤 아이도 날 깔보지 못했다. 이전에는 응달에 있는 버섯처럼 수줍었는데, 지금은 담임선생의 턱에 초 풍신권이라도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수의 곁엔 늘 많은 아이들이 들러붙었다. 태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위세가 올라간다는 것을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태수는 자신이 점찍은 몇과 함께 다녔다.
  태수는 점점 유명세를 떨쳤다. 이따금 옆 중학교와 시비가 붙으면 그 쪽의 짱과 일대일로 맞짱을 까서 단숨에 이겨버렸다. 태수의 싸움 방식은 그야 말로 철권의 풍신권 류(類)였다. 언제는 한번, 싸우지 않고 ‘동맹’을 맺었다고 했다. 상대 중학교의 짱이 의외로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고, 그래서 도원결의 하듯 ‘동맹’을 맺었다. 한 번은 내게도 소개를 시켜줬는데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태수라 하더라도 풍신권이 닿지 않을 성 싶었다. 이름은 종혁이라 했다.
  태수와 종혁의 ‘동맹’으로 일대의 중학교는 평정되었다. 평화로운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태수는 여전히 나와 철권을 했다. 화면 속 두 캐릭터가 서로를 한 대라도 더 때리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한참 버튼을 열심히 누르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오락기 위에 동전을 올렸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알리는 오락실만의 룰이었다. 불청객은 이 동네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교복이었다. 내가 태수에게 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불청객이 태수와 철권을 겨뤘다. 결과는 불청객의 압승이었다. 태수는 신경질적으로 동전을 넣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태수의 입에서 욕이 새나왔다.
  “씨발, 치사하게 하네.”
  불청객은 대뜸 이런 말로 대꾸했다.
  “네가 태수냐?”
  둘은 한참을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나니 태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따라오지 말라, 는 태수의 명령이었다. 그것이 내가 본 태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태수는 더 이상 학교에 오지 못했다. 태수는 공터에서 피를 잔뜩 흘린 채 발견 되었다. 공터를 가득 메울 정도의 피였다고, 누구나 직접 본 것처럼 떠들어댔다. 달걀 같이 둥근 태수의 머리는 깨어져 피를 콸콸 쏟아냈다고 했다. 종혁은 범인을 물색했다. 종혁에게는 일대의 ‘짱’ 다운 행동력이 있었다. 종혁은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나에게 많은 걸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걸 답해줄 순 없었다. 교복이나 인상착의 등 본 것을 전부 말해주었다. 종혁은 탐정처럼 몇 주 동안 목격자와 증거들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좁은 동네였으므로 목격자들이 하나, 둘 나왔다. 종혁은 마침내 가까운 중학교에서 태수와 오락실을 나섰던 불청객을 찾아냈다. 사건 당시에 입었다던, 내가 말해준 교복의 차림은 아니었다. 종혁은 불청객을 집요하게 두들겨 팼다. 불청객은 자신의 죄를 고해바쳤고, 예상치 못한 이름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종혁은 태수가 발견되었던 공터에서 각목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종혁은 텅 빈 플랫폼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연구역인데, 말 할 수 없었다. 담배는 입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자신의 몸을 태워갔다. 종혁은 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공익이냐?”
  종혁은 내 옷을 보고 물었다. 사회복무요원이라고 바뀐 이름이 입은 옷 곳곳에 박혀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해와 같은 시간이 느리게, 구물거리며 흘러갔다는 생각이다.
  “어디 아프냐?”
  종혁이 물었다. 나는 괜찮다, 고 말했다. 다만 이유모를 발작이, 세계가 갑자기 침묵하는 시간이, 각목 이후로 찾아들 뿐이었다.
  “태수가 말이야.”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낯선 이름이 들려왔다. 나도 입으로 태수, 하고 굴려보았다. 농도 짙은 초콜릿처럼 씁쓸했다. 종혁은 한참을 뜸을 들였다.
  “다음 달에 귀국 한다더라. 알고 있었냐?”
  알고있을 리가, 없었다.
  태수는 여러 차례 수술을 해야 했다. 출혈이 너무 심해 위험한 고비도 몇 번 넘겨야했다. 그럼에도 태수는 멀쩡히 일어났다. 역시, 태수였다. 태수의 아버지는 태수를 끌고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사고만치는 아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나 보다. 그 때 나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병실에 누워있었다.
  세간에는 태수를 따르던 한 놈이 뒤통수를 쳤다고 소문이 났다. 그 배신자를 ‘동맹’을 맺은 종혁이 찾아내 복수를 했다고, 민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나는 태수를 두들겨 패고, 콸콸 쏟아지는 피를 보고 싶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난 언제나 그를 이기고 싶었고, 내 앞에 무릎 꿇은 그를 상상하기 즐겼다. 마치 철권처럼 말이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나는 태수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면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태수와 오락실에서 철권을 하는 사이라고 떠벌린 게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다른 애들은 주눅 든 개처럼 꼬리를 말았다. 그리고 불청객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 교복이 아닌 다른 교복을 입고 태수를 쳤다는 치밀함도 한몫 했을 것이다. 불청객은 자주 들리던 나의 이름을 종혁에게 거짓으로 댔고, 나는 종혁에게 교복이라는 허위 증거를 갖다 댄 꼴이 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그러나 불현 듯 태수와 나는 머리가 깨졌다.
  종혁은 나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태수의 뒤통수를 친 찢어죽일 배신자? 아니면 오해받은 태수의 절친한 친구? 무엇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태수는 날 어떻게 기억할까. 혹시나 자신을 죽이려든 게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작은 리볼버를 구해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태수가 내 머리통에 리볼버를 들이댄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그저, 태수와 나란히 앉아 예전처럼 철권 한 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들이 점점 모여들고 종혁도 안전선 밖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가 멀리서 들어왔다. 여전히 멀쩡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한 여자 승객의 새된 비명이 기차보다 우렁차게 공기를 찢었다. 달리는 기차를 향해 중년의 사내 또한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는 몸을 던져 안전선을 넘어 기차의 주둥이에, 쾅.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비명이 폭발했다. 사내에게서 터져 나온 피가 안개처럼 플랫폼에 흩날렸다.
  피 안개 너머로 한 마리의 멧돼지가 보인다. 작고, 겁에 질린 멧돼지다. 헌병들이 몰고 온 다섯 남짓의 어린 병사들이 멧돼지에게 총구를 겨눈다. 지휘관이 발포 명령을 내린다. 총을 당기는 병사들에게서 가학에서 오는 흥분이 맘껏 터져 나온다. 멧돼지의 두터운 가죽을 뚫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멧돼지는 모로 쓰러진다. 흘러넘친 피가 내 발 끝에 스민다.
  눈앞에 비명과 기억 저편의 포성이 강철의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짙고도 시뻘건 이명이 찾아들고 세상은 침묵에 잠긴다. 기차가 멈춰 선다. 세계가 움찔, 연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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